“한국전쟁 후 피난민 돌보다 이제 이주노동자 아픔나누죠”
서원 50주년을 맞은 미켈라 산티아고 수녀. 그를 만나기 위해 보문동의 한 비탈길을 올랐다. 필리핀공동체라는 간판이 붙은 작은 연립주택이 눈에 들어왔다. 그곳에서 만난 산티아고 수녀는 73세의 나이에도 노동사목을 하는 수녀답게 앞치마를 두른채 일하고 있었다.
50여년 전 수녀가 처음 한국에 왔던 당시 상황을 물어봤다.
“전쟁. 말도 못해. 생활이 너무 어려워서 한국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갈까 속상했었어.”
1957년. 한국전쟁이 막 끝나고 폐허의 잔상들로 가득했던 그때. 가난에 찌든 가족과 배곯아 우는 아이들, 공부를 뒤로 하고 일해야 했던 청년들은 한국전쟁의 자화상이었다.
그 시절 수녀 서원을 하자마자 앳된 얼굴로 비극의 땅 한국을 밟았던 사람이 바로 미켈라 산티아고 수녀다.
한국에 들어와 처음 일한 곳은 영등포 피난민촌. 그곳에서 전쟁고아들을 돌봤다.
“정말 불쌍했어. 물도 먹을 것도 없어서 아이들은 울기만 하지, 영어를 하는 사람은 나밖에 없지. 어떻게든 해야지 싶어서 미군부대에서 빵이랑 우유, 약을 얻어왔어.”
전쟁의 흉물들을 치워내고 후유증마저 가라앉을 70년대. 하지만 한국에서는 또다른 상황이 벌어졌다. 열악한 노동환경과 최악의 근로조건 속에서 노동자들은 노동운동의 불을 지폈다. 격동의 시기 한복판에서 수녀는 마산으로 일터를 옮겼다. 수녀가 간 곳은 마산 살레시오 노동자 기숙사. 배우지 못한 한을 품은 여공들의 꿈에 숨을 불어넣기 위해 영어와 일어, 타자 등을 가르쳤다.
“그때는 필리핀이 부자나라였고 한국은 가난한 나라였어. 그래서 도와줘야겠다는 생각만 했어.”
하지만 세월이 흐르며 세상도 변했다. 한국은 수녀가 얘기하는 ‘부자나라’가 돼갔다. 반대로 필리핀은 수많은 이주노동자들을 한국에 보내고 있다.
수녀 또한 한국 전쟁고아를 돌보다가 필리핀 이주노동자를 돌보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됐다. 수녀는 그게 세월이고 역사라고 말한다.
산티아고 수녀는 현재 필리핀 공동체 안에서 함께 어려움을 나누고 있다.
서울대교구 노동사목위원회 베들레헴 아가방의 책임 또한 맡았다. 베들레헴 아가방은 이주여성노동자들의 아이들을 임시로 돌보아 주는 곳이다.
“분유도 비싸고, 기저귀도 너무 비싸. 돈은 없고 불쌍도 하고. 오늘도 내가 가진 돈 삼만원 다 쥐어줬어.”
한국의 격동 반세기를 함께 하며 수녀도 많이 늙었다. 파르라니 빛나는 은빛머리와 쪼글쪼글해진 얼굴은 한국 노동 역사의 산증인임을 말해준다.
고국이 그립지 않느냐는 질문에 수녀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하느님이 한국에 나를 심으셨으니 여기서 열매를 맺어야지. 죽을 때까지 나는 한국에 있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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