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저녁 시간에 교우분과 만나기로 약속을 했는데 늦게 오셔서 좀 서운해하였다. 그분이 말하기를 개소문을 보다가 좀 늦었다고 한다. 개소문? 누구네 집 개 얘기냐고 묻자 오히려 그쪽에서 더 이상한 눈으로 날 보는 것이 아닌가. 요즘에 사극 ‘연개소문’ 하고 ‘주몽’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냐는 것이다. 그래서 그 후로 기를 써서 주몽 한번 연개소문 한번 보았다.
세상이 아무리 최첨단을 걷는다 해도 사극은 영원히 남는다고 본다. 사극은 동일한 이야기를 가지고도 최소한 서너 개의 이야기를 되풀이 할 수 있는 해석의 폭이 다양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사극의 또 다른 매력인데, 다른 이야기와는 달리 사극이 구성되는데는 최소한 서너 명의 배역만 있으면 된다는 이야기이다. 즉 왕과 신하 두 사람과 옵션으로 왕비 또는 주변 인물만 있으면 된다는 말이다.
사극이 영원히 흥미로운 주제일 수밖에 없는 것은 이렇듯 같은 이야기를 어떤 배역의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하나의 이야기가 여러 개의 다른 이야기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얼마 전에 대박을 터뜨렸다는 ‘왕의 남자’의 경우는 옵션의 해석이 성공한 사례라고 본다.
그래서 사실은 아니지만 비극적이게도 가끔 교회 안에서 작은 왕이라고 불리는 본당신부로 살면서 '사극이야말로 교회뿐만 아니라 세상의 모습을 늘 동일하게 반영하는구나' 하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다.
왕의 곁에는 대체로 두 부류의 사람이 있다. 각각의 부류들은 그들이 쓰는 언어로 자연스럽게 구분되는데, 한쪽은 주로 “성은이 망극하옵니다”는 말을 많이 쓰고 다른 한편은 “통촉하옵소서”라는 말을 주로 사용한다.
잘하고도 골 하나 먹으면 지고 마는 축구 같은 스포츠 경기에서는 결과 보다 과정이 중요하다는 말이 종종 공허한 소리로 들릴 때가 있다. 마찬가지로 인생살이도 때로는 내용보다 형식이 더 중요할 때가 많은 것 같다.
우리는 뻔히 알면서도 스스로의 꾐에 속아넘어가고 만다. 그래서 “통촉하옵소서”라고 말하는 네가 더 의롭고 올바른 사람인줄 알지만, 지금의 나는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라고 코밑에서 외치는 이놈의 소리가 더 듣고 싶다는 것이다. 통촉해야 마땅한 나를 누구보다 내가 잘 알고 괴로워하고 있는 중인데, 그런 나에게 왜 자꾸 통촉만 하라고 하느냐 말이다.
여보, 베드로 형제님, 마리아 자매님. 김 신부 이제는 제발 통촉하시라는 소리 그만하고 성은이 망극하다는 소리 좀 해보시오. 내가 듣고 싶은 말이 성은이 망극하다는 말이라는 걸 정녕 모른다는 말이오. 그러니 어디 한번 해 보시오.
주군! 지금 저희는 주군의 탁월한 지도력으로 말미암아 만사가 형통중인 태평성대를 살고 있는 줄 아뢰오.
가정에서 가장으로서, 본당에서 주임 신부로서, 교구에서 교구장으로서, 단체에서 장으로서 우리는 무슨 소리에 속이 뒤집어 지고 또 무슨 소리에 우쭐해 하는가?
배달하 신부(원주교구 대화본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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