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마다 봉헌한 쌀로 성전 지어
가난하지만 하느님 사업에 아낌없이 봉헌
공동체 이루는 곳마다 제일 먼저 경당 세워
초기 신앙공동체의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플로레스섬. 길을 닦고 콘크리트 건물을 세워 도시라고 이름붙인 마을에서부터 열대밀림의 오지 깊숙한 터까지 곳곳에 자리잡고 있는 신앙공동체를 만나는 여정이 시작됐다.
적도 위에서 작열하는 태양만큼 여전히 식지않은 인도네시아(이하 인니)인들의 신앙생활은 어떤 모습일까.
플로레스섬 마우메레 공항에 발을 내딛으면서부터 그러한 관심은 인니인들의 ‘생존’에 대한 관심으로 치받쳐올라, 수시로 억누르는 수고를 감수해야만 했다.
플로레스섬의 일면은 ‘꽃’이라는 뜻의 ‘플로레스’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험한 환경을 품고 있었다. 아무리 건기라고는 하지만 풍성함과는 거리가 먼, 한눈에도 메마름이 엿보이는 그러한 풍경이었다.
도로도 몇몇 도시의 중심에만 깔려있었다. 아직 연기를 내뿜는 화산이 있고, 잦은 지진을 겪는 이 섬에서는 도로건설은 가장 큰 난관임에 틀림없었으리라. 그나마 지금의 도로들도 대부분 2000년도 이후에 건설된 것이라고 한다.
공소 상량식 봉헌
첫 방문지인 마게판다(Magepanda)본당 고로(Koro)공소는 마우메레 시내에서 1시간30분 남짓 달려 도착할 수 있는 가까운 곳이었다.
마침 기자의 방문을 기다리기라도 한 듯 이날은 공소 상량식이 봉헌되는 특별한 일정이 이어졌다.
인니인들과의 첫 만남은 환호와 춤으로 시작됐다. 마을입구에서부터 수킬로미터 앞까지 트럭과 오토바이를 끌고 마중나온 주민들은 일행을 태우고 공소에 닿을 때까지 춤과 노래로 환영했다. 몇 년 전만해도 인니인들은 오토바이가 아닌 말과 마차를 준비해 손님들을 맞이했다고 한다.
공소 주변에는 인근 마을 주민들 500여명이 행사에 참여하기 위해 모여있었다. 이들은 방문객이 입구에 내려서자 전통 두건과 띠를 둘러주고 물을 뿌리며 춤으로 손님맞이 예식을 펼쳐나갔다. 나뭇가지와 천을 흔들어대며 목청껏 노래를 불러주는 이들의 환호는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예수님의 모습 조차 부럽지 않게 했다.
본당사제와 손님들이 공소 꼭대기에 양철지붕을 얹는 상량예식을 끝내자 공소건립을 축하하는 소카토자(Sokatoja)춤이 이어졌다.
우리로서는 5분도 서있기 힘든 뙤약볕 아래에서 이네들은 몇 시간째 흥겹게 춤을 추며 축하식을 펼쳤다. 또 그동안 공소 설립 과정과 지역민들의 신앙이야기, 현재의 삶의 모습 등을 읊는 연설도 힘있게 이어갔다.
이렇게 공소를 새로 지어 봉헌하는 날은 이 지역주민들에게는 최대의 축제날이었다.
축하식에 이어 주민들은 다함께 준비한 음식을 나누며 자축의 기쁨을 이어갔다. 그야말로 ‘한솥밥’을 먹는 공동체의 모습 그 자체였다. 전기도 수도도 연결되지 못한 마을, 변변한 나무그늘 하나 없이 먼지가 소복히 피어오르는 맨땅 여기저기에 둘러앉아 밥을 먹었지만 이들은 이보다 더 행복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들은 외부손님들에게는 각종 음식 외에도 필루와 난까, 기비 등 전통과자들을 수북히 내놓았다. 그러나 그 과자를 선뜻 입에 넣기는 쉽잖았다. 이곳 주민들의 곤궁한 부엌을 한번이라도 들여다본 이들은 모두 같은 마음이 될 듯 하다.
한 가정도 빠짐없이 동참
이날 행사에는 지역민들이 평소에 보기 힘든 발전기와 엠프가 최고 인기를 누렸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기 때문에 상량식 축하곡을 틀기 위해 특별히 빌린 장비들이었다. 이들의 어려운 살림살이로는 정말 큰 투자를 한 것이었다. 그만큼 그들은 공소 상량식에 큰 의미를 부여하고 있었다.
고로공소는 지난 2년간 지역 내 전 가정마다 쌀을 100kg씩 봉헌한 기금으로 지어졌다.
이곳 주민들에게는 수익이라고 할 만큼 변변한 벌이가 없다. 대부분 가정에서 하루 한두끼 정도 먹을 곡식이라도 거두면 다행인 정도이다. 그렇게 어려운 살림에도 불구하고 주민들은 단 한 가정도 빠짐없이 공소 짓는 일에 동참했다. 지붕을 얹은 후에도 공사는 계속 이어져야하고 그동안 빚도 많이 졌지만, 이들은 앞으로 추수 때마다 쌀을 조금씩 모아 봉헌해 십시일반으로 빚을 갚아나갈 예정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들의 희망은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실현이 녹록하지 않아 보인다.
고로지역은 개울·강 등 수원(水源)이 없는 곳이다. 이 지역주민들은 오로지 빗물과 약간의 지하수로만 생활용수를 감당해왔는데, 가뭄이 몇 년째 이어지고 있었다. 현재 아무런 작물을 경작할 수 없어 망연히 땅만 바라보고 있는 실정인 것이다.
게다가 고로공소의 모본당인 마게판다(Magepanda)본당도 새 성당을 짓기 위해 터를 닦고 기본 철골 구조를 세웠지만 공사비 부족으로 잠정 중단, 새 성당터가 점차 폐허로 변해가는 모습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삶과 신앙 뗄 수 없어
플로레스섬에는 성당 외에도 작은 규모의 경당을 수없이 만나볼 수 있다. 지역민들도 그 수를 다 알 수 없다고 한다.
그저 이들의 소박한 신앙심은 크고 작은 모든 지역에서 사람이 모여 살 때마다 경당 짓는 일에 가장 먼저 나서왔다. 때문에 첩첩산중 어디를 가도 자그마한 십자가는 키 큰 열대나무들 사이에서 솟아있었다.
당장의 먹거리나 가족들의 안위를 우선해 하느님을 모시는 일에 소홀하지 않는 신심이 바탕되었기 때문이다.
이곳 주민들의 삶은 대부분 교회 안에서 이야기되고 체험된다. 태어나서 자라 결혼을 하고 죽을 때도, 또 모든 경조사 때도 가장 먼저 찾는 곳은 당연히 교회이다.
그리고 이들의 가장 큰 목표는 수십킬로미터를 걸어가지 않고, 각자의 마을에서 미사를 봉헌할 수 있도록 성당을 세우는 일이다.
플로레스섬 지진 때 친교 맺어 복구지원 나서는 등 나눔 활발
◎고로공소-원주교구 천곡동본당의 특별한 인연
오지로 불리던 플로레스섬의 신앙촌들이 한국교회와 인연을 맺게 된 때는 10여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지난 1994년 플로레스섬은 대규모 지진으로 큰 피해를 입었다. 특히 마우메레교구 내 성당과 신학교 등은 처참하게 내려앉았었다.
당시 파푸아뉴기니에 선교사로 나가있던 사제를 통해 인니 신자들이 감당해야할 어려움을 접한 원주교구 곽호인 신부(천곡동본당 주임)는 본당 신자들과 뜻을 모아 불우이웃성금을 인니로 보냈다. 이를 계기로 원주교구와 가톨릭신문은 공동모금에 나섰고, 이곳 신학교와 성당, 공소 등이 새로운 모습으로 재건된 바 있다. 또 원주교구는 마우메레교구 사제를 한국으로 초청해 모금활동을 돕고, 각종 본당 사목방안을 나누는 등의 도움도 이어갔다.
특히 원주교구 천곡동본당 신자들은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친교를 맺은 인니 신자들의 어려움을 잊지 않고 작은 정성을 보내왔다.
이번 탐방에도 함께 동행한 곽신부는 신자들이 모은 3천달러의 성금을 고로공소와 틸랑본당, 하가라우공소 등에 나눠 전달했다.
곽신부는 “플로레스섬에는 경제활동을 위한 인프라가 턱없이 부족하고 환경도 열악해 이들의 자립을 위해서는 이웃교회의 도움이 절실하다”며 “우리들의 작은 정성이 이곳 신자들의 순수한 신앙을 지켜나가는데 큰 버팀목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현재 공사비 부족으로 건립을 중단한 마게판다성당과 고로공소의 완공을 위해서는 한화 8천여만원의 기금이 필요한 실정이다.
※공소건립에 도움주실 분=우리은행 702-04-107118, 농협 703-01-360433 (주)가톨릭신문사
사진설명
▶고로공소 상량식이 있던 날, 기쁨에 넘쳐 신자들이 춤을 추고 있다. 어려운 살림에도 한 가정도 빠짐없이 공소짓는 일에 동참했다.
▶원주교구 천곡동본당 주임 곽호인 신부가 고로공소회장에게 성금을 전달하고 있다.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