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기도 하나된 초기교회 모습 만나
해발 700여미터의 고지. 가파른 지형의 산꼭대기라 곧바로 올라가기 위해서는 절벽타기를 선택해야 할 판이었다. 능선을 타고 꼬불꼬불 산을 휘휘돌아 도착할 수 있는 자그마한 터에 ‘하가라우’(Hagarau)공소가 자리잡고 있었다.
첩첩산중의 공소
인도네시아 마우메레(Maumere)교구 틸랑(Tylrang)본당에 속한 하가라우공소는 플로레스섬 안에서도 그야말로 ‘오지’라는 수식어가 붙어야 설명되는 첩첩산중이다.
이 신앙촌 방문은 때묻지 않은 초기공동체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는 설레임으로 시작됐다. 그러나 여정은 꽤나 냉혹했다.
나무 가로대 하나 없는 좁은 길은 듣던 것과 달리 길이 아니라 그저 울퉁불퉁한 돌밭이었다. 또 이곳 차량들은 바퀴와 핸들 외에는 계기판의 그 어떤 것도 움직이지 않는 오래된 중고 지프. 이동 도중 내내 ‘어떻게 차가 뒤집어지지 않을 수 있을까’ 궁금할 정도의 힘겨운 ‘오프로드’였다. 그나마 산길의 반 정도는 차로 이동할 수 없어 기다시피 올라가야 했다.
의자 옆 손잡이 하나에 의지해 온몸을 덜컹거리기를 두시간여. 어느덧 대나무로 지어진 낡고 바랜 집들이 줄줄이 이어질 때야 비로소 사람이 사는 곳임을 실감하기 시작했다.
자연재해로 생계힘들어
하가라우공소이자 마을인 이곳에는 600여명이 거주하고 있다. 왜 이런 곳에 마을터를 잡았느냐를 굳이 물어볼 수는 없었다. 가진 것 없고 일굴 땅이 없는 이들은 산으로 산으로 올라 화전을 일구는 것이 인도네시아인들의 일반적인 모습이다. 인구의 80% 가량이 농업에 종사하지만 역시나 빈부차가 극심하다.
게다가 섬지역은 해마다 돌풍과 지진 등 자연재해가 끊이지 않아 안정된 생활기반을 갖추기가 쉽지 않다. 이곳 공소 신자들도 올 여름 돌풍에 극심한 피해를 입어 모여 앉기만 하면 먹거리 걱정에 한숨을 쉰다.
하가라우 지역에는 1930년대 네덜란드 선교사에 의해 처음 복음이 전파됐다. 세계 제2차대전 중에는 일본 주교가 이곳을 직접 방문해 신자들을 격려할 정도로 모범적인 신앙촌이었다고 한다. 물론 지금도 마을 주민 100%가 신자들이다.
마을 주민들의 생활 모습은 열악하기 그지없었다. 전기와 수도는 전혀 연결되지 않았다. 이들은 일주일에 한번 1시간 거리의 산 중턱에 있는 샘물에 가서 빨래를 하고 물을 길어온다고 한다. 그래도 주일이면 마을 사람들은 어렵사리 길어온 물을 아낌없이 씻고 치장하는데 쓴다. 연료는 아직도 나무땔감이었다. 시골마을에서 보았던 석유곤로조차 이곳에서는 찾아보기 어렵다.
교육기관이라고는 초등학교가 유일하다. 정식 교사는 없고, 학습기자재도 쓸만해보이지 않았지만, 수십명의 마을 어린이들에게는 더할 나위없이 소중한 배움터가 되고 있었다. 이들이 중고등 교육을 받기 위해서는 최소한 틸랑본당까지 나가야한다.
경당은 마을의 자랑거리
그래도 마을을 한바퀴 돌아 온 마을 주민들이 다함께 소개한 곳은 역시나 경당이었다. 경당에 대한 설명을 할 때 이들의 눈빛은 자랑스러움과 기쁨이 가득 비쳤다. 마을 중심에 자리잡은 경당은 좀 어설퍼 보였지만 시멘트 벽돌과 바닥을 갖추고 슬레이트 지붕까지 얹혀 있었다. 사실 경당을 바라보는 기자의 머리 속에는 이 벽돌과 시멘트를 어떻게 산꼭대기로 옮겼을까 하는 의문이 가장 먼저 들었다.
신자들은 주일이면 경당에 플라스틱 의자를 가져다 놓고 미사와 공소예절을 봉헌하고, 마을의 크고 작은 일들도 치룬다. 미사는 한달에 한번 본당신부가 방문할 때만 봉헌할 수 있지만, 매 주일이면 온 마을 사람들이 어김없이 가장 좋은 옷을 차려입고 성당으로 모인다.
특히 이곳 공소 신앙생활의 가장 큰 특징은 소공동체 모임이다.
신자들은 매일 저녁이면 10~15개 가정씩 한집에 모여 함께 기도를 바치고 있었다. 또 이른 아침이면 어느 가족이든 어김없이 조상들의 무덤가에 모여 촛불을 밝히고 기도한다. 갓난아이 때부터 손을 모으고 기도하는 습관이 자연스럽게 몸에 배여 따로 신앙교육을 하지 않아도 삶에서 기도를 빼놓지 않는다고 말한다.
각 가정마다 가장 귀하게 보관하는 재산도 단연 성물이었다. 마을 내 모든 가정에서 세례 혹은 견진성사 때 받은 성물과 전례력, 성화복사본 등으로 벽을 장식하고 있었다.
인도네시아 교회 방문의 길잡이 역할을 한 틸랑본당 전 주임 알로이시오 우링 라가마킨(Aloysius Wuring Lagamakin) 신부는 “이것이 진정 플로레스인들의 삶”이라고 말한다. 가난하지만 마음의 여유만은 그득한 삶, 신앙 안에서 하나로 일치하고 기쁨을 나누는 이들의 모습이었다.
1박2일의 짧은 여정을 보내고 산을 내려오는 길에 의자를 이고 나르는 사람들을 만났다. 두어달 전 있었던 첫영성체 예식 기념파티를 오늘 저녁에 열기 위해 준비하는 중이었다. 당시에는 돈이 부족해 음식을 마련할 수가 없었다고 한다. 그지없이 밝은 웃음을 보이며 잔치를 준비하는 그들의 모습에서 가파른 산길을 오르는 힘겨움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협소한 대나무집에서도 가정마다 기도공간 갖춰
◎플로레스섬 신자들의 모습
플로레스섬 신앙촌들을 방문하면서 관심을 모은 것은 각 가정마다 갖추고 있는 기도공간이었다.
이곳 신자들, 즉 주민들은 소득이 낮거나 거의 없는 형편으로 대부분 직접 대나무로 지은 가옥에서 거주하고 있다. 하지만 아무리 협소한 공간에라도 꼭 십자가와 성화 등을 걸어두고 온가족이 모여 기도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고 있다. 또 집집마다 조상의 무덤을 두고 십자가를 세워 매일 둘러서서 기도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특히 생활 형편이 좀 나은 집들은 따로 성모당과 기도실 등을 마련하기도 한다. 하지만 성물판매소 등도 따로 갖추고 있지 못해 재래시장에서도 종종 판매한다.
아직 문명의 혜택이 널리 퍼지지 못한 플로레스섬에서 통신과 교통의 어려움은 전교와 신앙생활의 가장 큰 난관이다.
현재 플로레스섬에서 각 본당을 연결하는 유일한 통신시설은 무선통신이다. 매일 오전 10시면 각 본당 사제들은 모두 무선통신을 켜고 각자 본당의 소식을 전한다. 그러나 오지 공소에서는 무선통신 조차 연결되지 않아 밀떡과 포도주가 떨어져 발을 동동구르기가 십상이다.
여느 개발도상국이 그러하듯 인도네시아에서도 케이블을 깔아야하는 유선통신보다 무선통신이 우선 보급되고는 있지만, 아직까지 대부분 공소는 휴대폰 사용제한지역이다.
또 각 본당 사제들이 공소 방문을 한번 하기 위해서는 좀 과장해서 말하면 목숨을 걸어야 할 지경이다. 워낙 가파른 길을 오토바이 등으로 이동해 사고도 잦기 때문이다.
최근 도심에는 인터넷 서비스센터와 우체국 등이 개설되어 있지만, 플로레스섬 대부분의 지역에서는 여전히 본당과 공소 등을 정기적으로 오가는 사제들이 우편배달부의 역할도 겸하고 있다.
※인도네시아교회 공소건립과 운영에 도움주실 분=우리은행 702-04-107118, 농협 703-01-360433 (주)가톨릭신문사
사진설명
▶주일미사를 마치고 나온 공소 신자들이 경당 앞에 모여 환하게 웃고 있다. 매 주일이면 가장 좋은 옷을 입고 성당으로 모인다.
▶한 신자집에 마련된 기도방. 각 가정마다 기도공간을 갖추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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