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 찾는 주민들로 온종일 장사진
전기 부족으로 의료장비 가동 못해
#원주민들의 희망터 루위병원
“박사님! 박사님!”
칠흑 같은 어둠에 묻혀 간신히 앞을 가늠할 수 있는 복도를 달려온 다급한 발걸음이 방문을 거세게 쳐댄다. 순간 또 무슨 급한 일이 생겼음을 직감한 장순명(베네딕토.65.서울 가락동본당) 박사가 읽던 책을 접고 익숙하게 가운을 걸치며 방을 나선다.
밤 10시가 가까워오는 시간, 병원 문이 닫힌 지는 오래지만 장박사가 환자를 보는 진료실 근처에 웅크리고 있는 두 개의 그림자가 보였다. 가까이 다가가자 흑인 청년 한 명이 눈두덩을 움켜진 손가락 사이로 뚝뚝 굵은 피를 쏟고 있었다. 급히 응급실 문을 열고 병상에 청년을 눕히자 하얀 침대 커버가 이내 붉은 피로 물든다. 클리니컬 오피서(clinical officer)로 활동하고 있는 김근숙(마들렌) 수녀도 소식을 듣고 달려왔다.
“너무 어두운데….” 두 개의 전등이 밝혀져 있었지만 낮에 태양열판으로 모아둔 전기를 끄는 터라 백열등보다 못해 영 신통치 않다. 간신히 손전등을 찾아 환자의 얼굴 부위를 비추자 눈 밑의 볼 뼈까지 보일 정도로 깊은 상처가 드러났다. 어둔 밤 자전거를 타고 가다 넘어져 나무 등걸에라도 심하게 부딪힌 모양이다. 장박사가 익숙한 손놀림으로 처치를 하자 그제서야 제정신이 돌아온 청년이 가는 신음을 뱉는다.
“좌멸창(피부가 뭉게지는 심한 상처)입니다. 다행히 눈은 다치지 않았군. 다행이에요.” 가슴 속 깊숙이에서 ‘다행’이란 말을 끄집어낸 듯한 장박사가 조용히 안도의 한숨을 내뱉는다. 마음 같아서는 파상풍 주사도 놓아주고 싶었지만 약도 귀한 땀부에서는 기대하기도 힘든 일이다.
형의 부축을 받아 루위병원을 찾은 흑인 청년 시메온(28)으로서는 정말 다행한 일이었다. 병원이 없었고 또 외과의인 장박사가 그 자리에 없었더라면 과다출혈이나 상처 감염으로 어찌 됐을지 모를 일이기 때문이다.
장박사가 청년을 치료하고 있는 중에도 날카로운 울음소리가 병원을 떠나지 않는다. 어린이병실로 걸음을 뗀 장박사가 전등 하나로 간신히 어둠을 밀어내고 있는 병실 문을 열자 울음의 주인공이 처참한 모습을 드러낸다.
4살, 한참 재롱을 떨어야 할 나이의 남자아이는 까맣게 말라붙어 흡사 나뭇가지를 붙여놓은 것 같은 손가락을 드러낸 채 연신 고통에 찬 울음을 토해내고 있었다.
“여건만 되면 타버린 손가락을 떼어내는 게 좋은데...” 머리부터 다리까지 3도 화상을 입은 아이의 상태를 살피던 장박사가 안타까운 듯 고새를 저어댄다. ‘의수(義水)라도 해줄 수 있으면 좋으련만….’ 아이의 미래를 생각하다 복잡한 심경이 되고만 장박사의 뇌리에서는 답답한 마음이 떠나질 못한다.
“이 맘 때면 화상 환자들이 많아요.” 장박사를 돕던 김수녀의 설명이 이어진다. 추위를 피하려 움막 안에 숯불을 피워놓고 자다 화재가 나 온가족이 참변을 당하는 경우도 적잖다는 것이다. 지역적으로 남자들은 내장이 피부 바깥으로 불거져 나오는 탈장이, 여성은 자궁외임신이나 자궁근종 등 산부인과 합병증이 많아 사망률이 높다. 어린이들의 경우 영양실조는 보통이고 한두 가지의 합병증을 안고 살아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러다보니 평균수명이 35살을 넘기기 힘든 실정이다.
이런 가운데 문을 연 루위병원은 원주민들에게 병원 그 이상의 존재다. 6년 전 프란치스코 전교봉사수녀회 선교사들이 들어오기 전만 하더라도 땀부는 버려진 땅이나 다름없었다. 가난한 이들의 경제적 자립을 돕는 마이크로프로젝트 은행(Microproject Bank)마저도 가능성이 없는 곳이라고 일찌감치 포기한 지역이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통해 이루려고 하시는 뜻이 무엇일까?’
지난 2000년 땀부에 첫발을 디딘 강민영(카리타스) 수녀를 비롯한 선교사들의 마음속에는 오직 한 가지 생각뿐이었다. 하지만 땀부의 현실은 굳이 오랜 고뇌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
답사 차 땀부를 들른 첫날부터 닫은 지 오래인 진료소 문을 다시 열고 환자를 볼 수밖에 없을 정도로 원주민들의 삶은 눈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처참했던 것이다. 하지만 루위병원을 열고 나서 더 큰 문제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나타나기 시작했다. 당장 입소문을 타고 밀려드는 환자들은 하루가 다르게 늘어만 가는데 항생제나 주사약마저 감당하기도 힘든 상황이다.
X레이실과 수술실 등이 갖춰져 있지만 현재 이용하고 있는 태양열판만으로는 장비를 가동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햇빛이 모자라는 우기에는 디젤유로 발전기를 돌려야 그나마 불이라도 밝힐 수 있는 형편이다.
전기가 없어 냉장고도 쓸 수 없다. 이 때문에 미리 수혈을 받아 피를 보관해둘 수가 없어 위급한 환자가 생기기라도 하면 현장에 있는 누구의 팔을 잡고서 피를 뽑아야 한다. 그래서 임상병리사로 활동하고 있는 유재연(율리에타) 수녀의 답답함을 누구 못지 않게 크다. 무슨 병인지 제대로 검사를 해야 치료를 시작할 텐데 지금은 간기능 검사 등 생화학검사는 엄두도 못 내고 현미경을 이용한 기본적인 검사를 하는데 만족해야 하기 때문이다.
# 자전거 탄 풍경
지금 땀부에서는 자전거 열풍이 불고 있다. 하루에 기껏 자전거 한두 대도 볼까말까 했던 3, 4년 전과는 몰라보게 달라진 모습이다. 돈이라곤 만져보지 못하던 주민들 가운데 병원을 짓는 과정에 동참한 이들이 노임으로 받은 돈을 저축해 자전거를 마련하면서 나타나기 시작한 변화다.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억새풀을 엮어 올리던 지붕을 함석판(iron sheet)으로 바꾸고, 태양열판을 설치해 전등을 밝히는 가정도 하나둘 생기고 있다.
마을주민 도로시 아눔바(39)씨는 “수녀님들은 우리들에게 천사나 다름없는 존재”라며 “천사들을 보내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 선교후원 : 우리은행 111-318370-13-001(프란치스코전교봉사수녀회)
#땀부에서 봉사활동 펼치는 장순명 박사
“의료인력 절대 부족해요”
“개척자들이에요. 믿음을 주는 사람들…. 아무리 칭찬해도 넘치지 않아요.”
얼마나 봤다고 수녀들에 대한 칭찬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자신도 봉사라면 이골이 날대로 난 터이지만 수녀들을 대하는 외과전문의 장순명(베네딕토) 박사의 모습에는 경외감마저 전해져왔다.
우연한 기회에 수녀들이 아프리카 오지에서 의료선교 활동을 한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장박사는 불현듯 자신이 있어야 할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따지고 보면 그와 아프리카의 인연은 질기다. 중학생시절 의사였던 아버지가 가져다준 잡지에서 슈바이처 박사 기사를 읽고 동경하는 마음을 품었던 게 오랜 인연의 시작이었던 셈이다. 꿈이 현실이 되려고 그랬을까, 20여년 전 우간다에서 봉사활동을 한데 이어 지난해에도 ‘국경없는 의사회’(MSF) 일원으로 라이베리아에서 2개월 남짓 머무르며 200여건이 넘는 수술을 집도하기도 했다.
새벽 3시 기도로 시작
노동허가증이 늦게 나오는 바람에 지난 8월말에야 잠비아로 올 수 있었던 장박사는 루위병원에서 수녀들과 함께하며 새로운 열정을 불사르고 있다.
새벽 서너시에 자리에서 일어나 수도자들과 함께 성무일도를 바치고, 미사를 봉헌하고 나면 곧장 하루일과가 시작이다. 시도 때도 없이 찾아오는 환자들로 쉬다가도 수시로 병원으로 달려가기 일쑤다. 짬이 날때면 현지 사정과 새로운 의학지식을 익히느라 잠시도 가만히 있을 틈이 없다.
나누는 행복 체험
하지만 날을 거듭할수록 덩달아 그의 안타까움도 커져만 가고 있다. 당장 도움을 줄 수 있는 환자들이 적지 않은데 현지의 이런저런 사정으로 손놓고 있어야 할 경우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의료인력이 절대 부족해 답답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닌데다 무엇보다도 전기 사정이 수술을 하기에는 여의치 않아 환자를 두고도 어쩌지 못하는 경우가 적잖다.
급기야 엑스레이기를 다룰 수 있는 기사를 구하기 어려운 현실을 알고 나서는 자신이 몸소 배우겠다고 나서기까지 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면서도 그의 마음 한 곳에서는 ‘다시 젊은이가 돼 의학공부를 하고 좀더 일찍 올 수 있다면….’하는 생각이 떠나질 않는다. 그만큼 절박함이 더해가고 있기 때문이다.
“하느님이 주신 능력을 나누고 싶어도 못하는 경우가 있어요. 그런데 비하면 저는 행복한 거지요.”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이라 봉사가 아니라고 손사래 치는 장박사는 능력이 닿는 데까지 자신을 내어놓고 싶다는 뜻을 밝힌다.
“얼마나 시간이 걸릴 진 모르겠지만 루위병원이 뿌리내릴 수 있도록 기초작업을 해놓고 싶습니다. 그것이 성모님이 저를 이곳까지 이끄신 뜻이 아닌가 합니다.”
내년이면 꼭 의사생활 40년째를 맞는 장박사, 어느덧 선교사를 닮아가는 그는 누군가가 자신의 길에 함께해주길 청하는 듯했다.
사진설명
▶땀부 원주민들의 희망터인 루위병원 전경. 영양실조 등 합병증으로 평균수명이 35세에 불과한 이곳 주민들에게는 이 병원이 새로운 희망이 됐다. 하지만 전기부족으로 의료장비를 제대로 가동못해 애를 태우고 있는 실정이다.
▶자전거 한대 제대로 없던 땀부에서는 현재 자전거 열풍이 불고 있다.
▶넘쳐나는 환자들로 눈코뜰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는 장순명 박사가 환자를 진료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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