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못의 성찰·고백·사랑 요청
앞서 본 것처럼, 리치는 그리스도교 전통을 한문으로 저술하고 소개한 선구적 유럽인이자 동아시아의 종교와 사상 전통을 유럽어로 매개한 탁월한 그리스도인이었다. ‘선구’란 단순히 영광스러운 찬사를 의미하는 것만은 아니다. 이미 돌아보았듯이, 그것은 제약과 한계를 의미할 수도 있다.
마테오 리치의 우월주의
다시 말하거니와, 리치 그는 그의 시대의 아들이었다. 그러므로 리치가 동아시아 문화에 대해서 보이는 인식의 한계와 우월주의는 당연히 그가 들어선 패러다임, 곧 당대 그리스도교 세계 인식의 한계에 근거하여, 그리고 그것과의 상관 구도 속에서 검토할 필요가 있다.
그런 가운데 그의 역할을 종교사, 문화사, 사상사, 정치사의 관점에서 직시하면서, 그의 한계를 포착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당연히 후대 교회는 그가 열어 놓은 대화의 장을 보다 더 성숙한 대화와 교류의 통로로 확장할 과제를 갖고 있었다.
이런 맥락에서 리치의 한계를 지적하면서 후대의 심화와 발전을 통하여 그 한계가 어떻게 극복되어 갔는가를 볼 수 있다면, 이것은 참으로 정상적인 기쁨이자 고마움일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특히 18세기에 접어들 무렵부터는, 이 면에서 별다른 성과를 찾기 어렵다. 오히려 후대의 중국 선교사들은 리치의 비전을 그리스도교 중심의 본질주의적 교리 논증으로 변질시킨 면이 있다.
과거 토마스 아퀴나스가 열어 놓은 신-인간-세계 인식의 신학적 역동성을 후대의 토미스트들이 일정하게 본질주의적 사변으로 위축시켰던 것처럼 말이다.
실로, 리치가 시대의 아들로서 남긴 한계는 그가 열어 놓은 새로운 지평을 발판으로 삼아서 후대가 끌어안아서 풀어주어야 할 성격의 것이었다.
그러나 후대 교회는 리치가 안고 있던 한계들을 극복하여 리치의 위대한 행보를 하느님의 다스림에 보다 더 부합한 형태로 형성해 가지 못하였다. 도리어 그 한계를 더욱 더 악화시키는 형태로 오도하기조차 하였다.
실제로, 후대의 서구 교회는 오랜 동안 리치에게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의 작품들은 서고나 심지어는 창고에 파묻힌 채, 새 시대를 맞기를 갈망하고 있었다.
그런 속에서 19세기 서구 교회는 리치의 한계를 극복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그 한계를 있는 그대로 직시하지조차 못하였다.
이들은 그가 열어 놓은 복음화의 새로운 창의 의의를 올바로 계승할 운동을 다시 일으키는 데만도 거의 300여년이 걸리게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리치의 비전은 부분적으로는 그의 생전에도 비판받기 시작하였지만, 특히 1700년을 전후하여 단죄되기 시작하여, 20세기 중반에 열린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이르기까지 세계 가톨릭 교회에서 일정하게 소외되고 말았던 것이다.
악화된 관계 극복을 위해서는
이런 면에서 오늘에 와서야 이렇게 리치의 한계를 거론한다는 것 자체가 한편으로는 그의 사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유럽 가톨릭 교회는 물론, 동아시아 사회에 존재해 온 가톨릭인들의 신학적 한계를 그대로 드러낸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이 시대에는 다행히 과거 리치가 배태하고 있었고 후대 그리스도인들이 악화시켰던 그리스도교와 동아시아의 제종교 전통 사이에서 발생한 파괴적 관계를 극복할 수 있는 정신적, 종교적 토대를 갖추고 있다. 이런 현실에서 하느님의 정의에 부합하는 새로운 시대, 새로운 관계를 위하여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리치와 같은 신앙을 나누고 있는 한 신학도로서 그리스도인의 관점에서 말하자면, 그것은 과거 리치 시대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유발시킨 불행한 관계에 대한 냉철하고도 겸비한 성찰과 이에 대한 정직한 고백이다. 그리고 이를 철저하게 극복하려는 사랑과 돌봄의 투신이 요청된다고 믿는다.
이를 통해서 비로소 우리 교회는 동아시아 사회 속에서 그리스도교와 동아시아의 제종교 전통이 서로 존중할 뿐만 아니라 서로를 풍요롭게 하는 새로운 관계를 보다 더 아름답게, 그리고 보다 더 탄력있게 열어 갈 수 있게 될 것이다.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초대에 어떻게 응답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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