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아는 것이 토착화 시작
마음은 보이지 않는다. 원의 중심이 보이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 그 마음이 우리를 우리이게 한다. 원의 중심이 원을 있게 하듯이. 보이면 그것은 이미 마음이 아니다. 사람의 마음이 이러할 때, 온 우주 생명의 중심이신 하느님 마음이야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그 보이지 않는 하느님 마음이 신학의 기원이요 영성의 원천이며 사목과 복음화의 원동력이다. 바로 이 마음을 알고 살아가는 것이 토착화의 시작이요 전부이고.
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역사
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역사를 연구하다 보면, 사제단 결성의 계기로 평가되어 온 지학순 주교 사건을 해석하는 방식에 차이가 있음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이런 현상에 직면하여 한편으로는 당연한 일이라고 여기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마음이 아프고는 했다.
1974년초 시인 김지하 등이 민청학련 사건으로 구속되었을 때였다. 이 절박한 상황에서 당시 민주화운동을 주도하였노라고 말하는 사람들 가운데는 교회를 끌어들여서 박정희 정권과 맞서게 만들 필요를 역설한 이들이 있다. 이들은 이 목적을 관철시키기 위하여, 민족의 생명을 돌볼 목적에서였다고 하고 또 이것이 사실이었겠지만, 지주교를 소위 ‘포섭’하였다고 말한다. 그리하여 마침내는 정의구현전국사제단을 결성하게 해서 교회를 이용하여 민주화 운동을 지속시켰다는 것이다.
나는 말한다. 지학순 주교는 그들의 그런 속마음을 알고 있었다고. 알고도 넘어가 준 인물이라고. 왜? 그는 목자이니까. 하느님의 종이었으니까.
그리하여 교회를 이용하며 민주화를 꿈꾸던 바로 그 사람들을 하느님 당신이 쓰셔서 그분이 이땅의 민중을 위하여 할 일을 하시게 하고 싶어하였으니까.
지주교는 가톨릭 교회의 사목자로서 민주화운동이나 인권운동에 참여해도 했지, 민주화 운동과 인권운동을 위한 투사 노릇을 위하여 자신의 주교 직분을 이용한 인물이 아니었다. 민주화나 인권 자체가 주교 직분 수행과 구분되는 것은 아니었으나, 적어도 민주화나 인권에 대한 관심이 지주교의 사목자 정체성에 앞서게 했던 존재는 아니었다.
그런데 교회 내에서도 이 사실을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이 적다. 이것은 지주교의 사목 비전을 이해하는 성직자나 신자가 드물다는 것을 말하는데, 이 사실이 신학을 하는 나를 안타깝게 만든다.
나는 말한다. 지학순 주교는 자신의 사목 여정에서 민족의 역사 현장에서 고난을 당하던 이들을 품어안은 사마리아인과 같은 존재라고. 하느님께 부여받은 저 마음으로 자신의 사목 직무에 충실하고자 말에서 내렸고, 신음하는 이들 곁으로 다가갔으며, 고통당하는 이들에게 자신의 등을 내어주어 쉬게 하였던 한 목자였다고.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세상에 열린 사목 비전’을 자신의 삶의 현장에서 구현하면서, 그 지평을 성당 담장 안에 가두지 않았던 선구자라고. 그리하여 현대 세계의 위대한 가톨릭 정신이 이땅 한국에서도 생명을 살리는 에너지로 작용하게 할 줄 알았던, 신학과 영성과 사목의 한 위대한 소통자라고.
사마리아인과 같은 존재
지주교는 자신이 행한 그 모든 일의 수혜자 가운데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사제단의 모든 구성원에 대해서 이렇게 말할 수 있을는지에 대해서는 나는 모른다. 하지만 지주교의 경우는 그렇다. 그는, 한마디로, 잊혀져 있고, 더욱 더 잊혀져 가고 있는 그런 존재이다.
원주 선언 30년을 기념하는 행사를 2006년 초에 원주교구 원동 성당과 원주 가톨릭센터에서 가졌다. 작년 초에 정인재 현밝음신협 이사장이 발의하여 7월경부터 준비해서 올 1월 23일에 가진 이 기념행사를 준비하면서,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이 사건을 가능하게 한 여러 인물이 있었다. 그런데 이 모든 인물이 왜 원주로 모여들었는가?
이유는 의외로 단순하였다. 그것은 원주에 지학순 주교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언덕이 되어 주고 품이 되어 주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는 원주 선언 어디에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원주선언이 가능하도록 뒷심이 되어 준 그였으나, 그는 감추어져 있다. 사람들이 놀도록 바닥이 되어 주고는, 그냥 그렇게 밟히고 있을 뿐이었다.
이것이 마음이 존재하는 방식이다. 이것이 중심이 자기를 살아가는 길이다. 나는 저 마음이 그립다. 저 보이지 않게 있을 줄 알았던 ‘마음의 목자’ 지학순 주교가.
황종렬(미래사목연구소 복음화연구위원장)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