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 사랑’ 삶에서 육화
지학순 주교는 자기를 ‘포섭’하려 드는 이들에게 스스로를 내어주었다.
그리하여 자기를 이용하려는 그 사람들조차 하느님이 쓰실 길을 열어 놓을 줄 알았고 그리고는 잊혀질 줄 알았다. 하느님과 민중을 섬기며 잊혀질 줄 아는 이 마음 없이는 토착화란 차라리 말도 꺼내지 않는 것이 나을 것이다. 이런 마음 없이 하는 토착화는, 그동안 체험해 왔듯이, 사태를 악화시키기 쉽기 때문이다.
마음이 없으면 토착화 없다
이제 더는 토착화를 기법으로 생각하는 데서 그쳐서는 안된다. 토착화는 마음의 일이다. 마음이 없으면 토착화 없다. 형식적으로 하는 척하는 한, 거기 어디에 토착화가 있을 수 있겠는가?
형식적인 토착화란 형식을 거둬치우면 사라지게 되어 있다. 그런 토착화 때문에 얼마나 많은 수고와 애정과 기도가 낭비되는지 직시하라.
어떤 사람들은 토착화가 너무 되어서 문제라는 괴이한 말들을 하기도 한다. 과연 그럴까? 토착화가 마음으로 하는 것인 한, 진정한 토착화란 끝이 없는 법이다.
토착화를 마음으로 하고자 노력해 온 이들은 안다. 아무리 사랑한다 해도 여전히 다 사랑하지 못한다는 것을 아는 것처럼, 토착화를 다 했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을.
토착화를 마음으로 할 줄 모르는 사람들, 토착화를 사랑으로 하지 않는 사람들이나 저런 식으로 말하고, 설령 토착화를 한다고 해도 아직 제대로 하지 못한 사람들이나 저런 말들을 할 수 있을 뿐이다. 마음은 딴 데 있으면서 토착화를 하는 척하는 사람들이나 저런 식으로 마음 아픈 말을 하게 될 것이다.
김승혜 수녀는 예언자적인 통찰력으로 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정의를 위한 투신을 토착화의 관점에서 해석한 적이 있다. 이런 해석은 토착화가 마음의 일이라는 것, 하느님의 사랑의 다스림을 자기의 삶의 자리에 육화시키고자 하는 헌신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토착화를 구성한다는 것을 전제로한다. 여기서 관건을 이루는 것이 ‘사랑’이요, ‘아픔을 함께 짊어질 줄 아는 마음(com-passion)’이다.
실제로 하느님의 정의와 생명을 위한 투신이 토착화의 근본이라고 할 때, 지학순 주교가 이런 의미의 토착화를 선구적으로 이끌어 간 것이 우연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는 건강 때문에 신학교에서 나온 적이 있었고, 해방 직후 공산군에게 붙들려서 죽음의 경계를 체험했으며, 사제가 되어서도 가난한 교우들과 바닥을 체험하였다. 그는 주교가 되고도 이같은 바닥 체험에 정직할 줄 알았고, 이런 체험을 2차 바티칸 공의회로 대변되는 선진적인 복음화 정신에 대조시킬 목자의 마음을 지켜갈 줄 알았다.
어두운 시대 한줄기 빛으로
우리는 이 점을 김수환 추기경의 증언을 통하여 확인할 수 있다. 지학순 주교가 하느님의 품으로 돌아갔을 때였다. 추기경은 그를 “어둡고 답답한 시대에 우리 사회가 보다 정의롭고, 인간답고 아름다운 복지사회로 변화될 수 있도록 노력할 뿐 아니라 이를 저해하는 독재체제 및 부정부패와의 전쟁을 선포하듯이 결연히 일어섰던” 지도자로 기억한다.
추기경은 지주교의 삶을 지탱시킨 것을 “하느님께 대한 믿음과 인간에 대한 사랑, 나라와 겨레에 대한 애국애족심”이라고 말하였다.
그런 가운데 지주교의 대사회 활동, 반독재, 민주화, 인권을 위한 투쟁을 오직 하나, 가난한 사람들, 억압당하는 사람들, 가난과 억압으로 신음하는 사람들에 대한 사랑에서 비롯된 것이라며 이렇게 증언하였다:
“지 주교님이 이같이 일어선 동기는…참으로 남달리 강하게 지니셨던 인간에 대한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이분은 고통받는 이가 누구이든지, 신자 비신자 관계없이 이를 보고 그냥 지나칠 수 없었습니다. 그를 위하여 무언가를 해 주지 않고서는 마음이 편치 못한 성품이었습니다. 그만큼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에 대한 연민의 정이 컸습니다. 그러므로 특히 가난과 고통이 본인의 탓이라기보다 억압정치와 구조 악에서 오는 것일 때 이에 대한 지 주교님의 의분은 불과 같았고 이 개혁을 위해 결연히 일어설 수밖에 없었습니다.”(http://cardinal.catholic.or.kr/w_7_9.html)
나는 이 마음의 사목자, 지학순 주교가 그립다. 독자들은 어떠신지?
황종렬(미래사목연구소 복음화연구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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