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가구 중 1가구는 ‘주거빈곤가구’
재개발 그늘 속에 ‘빈익빈 부익부 현상’ 심화
임대주택도 턱없이 부족… “주거권은 생존권”
서울역 화려한 외관 옆으로 구불구불 미로 같은 좁은 길이 펼쳐진다. 용산 쪽방촌. 허름한 건물들이 밀집해 있고, 각 건물마다 평수가 채 1.5평도 되지 않는 쪽방들이 3~20개씩 다닥다닥 붙어 있다.
이곳에 사는 사람은 1000세대에 1500명. 대부분 하루 벌어 하루 먹기도 어려운 일용직 노동자들이다.
공동화장실 등 열악한 환경
가족이 없다는 김 아무개씨(62). 방안에는 먹다남은 라면 그릇과 쓰레기들이 어지럽게 널려있었다. 몸 하나 눕기에도 빠듯한 공간에서 김씨는 그렇게 남은 생을 보내고 있었다. 가장 불편한 것은 공동화장실. 평균 10가구 이상이 공동으로 사용하는 화장실은 아침마다 사람이 붐벼 마음 놓고 이용하기가 어려운 형편이다.
김씨와 이웃한 이 아무개씨(37)씨는 “과거에는 일주일에 4일정도 일을 했는데 요즘에는 2일 일하기도 힘들다“며 ”열심히 살려 해도 상황은 나아지지 않는다“고 말했다.
서울시민 중 현재 쪽방이나 비닐하우스 등 열악한 주거환경에서 사는 이들은 1만여명. 지난해 11월 서울시 소방방재본부가 시의회에 제출한 행정사무감사 자료에 따르면 2005년 상반기 현황조사 결과 서울시내 쪽방은 352개동 3883개, 주거용 비닐하우스는 1193개동이며 거주자 수는 1만명을 넘어선 것으로 나타났다.
이와 관련 소방방재본부는 “쪽방이나 비닐하우스는 거주환경이 열악한 데다 화재위험도 높지만 각 자치구에서 이들을 위한 마땅한 주거대책을 마련하기가 어려운 실정”이라고 말했다.
문제는 이같이 열악한 주거환경이 ‘남의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현재 건설교통부가 정한 최저 주거기준 중 침실 수와 넓이를 보면 ‘1인 기준 방 1개 3.6평, 3인 기준 방 2개 8.8평, 4인 기준 방 3개 11.2평’이다. 이는 사람이 누려야할 최소한의 공간을 의미한다.
하지만 국토연구원이 지난 2003년 낸 ‘새 정부 주택정책의 과제와 방향’이라는 연구보고서에 따르면 가족 수에 비해 방 개수와 넓이가 부족하거나, 전용 부엌 및 화장실을 갖추지 못하는 등 최저 주거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환경에서 사는 ‘주거빈곤가구’가 330만6000가구로 전체 가구의 23.1%에 이르고 있다.
임대주택 의미 퇴색
우리나라 4가구 중 1가구는 인간다운 주거생활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를 내용별로 살펴보면 ▲침실 수와 넓이가 건설교통부가 정한 최저 주거기준에 미달하는 가구는 전체의 14.6% ▲전용 화장실 및 전용 부엌을 갖추지 못한 가구는 5.2% ▲이 두 가지 기준에 모두 못 미치는 가구는 3.3%인 것으로 조사됐다.
최저 주거기준 미달가구이면서 주거비용(월세 등)이 소득의 30%를 넘고, 그나마 소득이 하위 20%에 속하는 극빈 가구수는 모두 127만 가구로 전체 가구의 8.9%인 것으로 나타났다. 건설교통부 자료에서도 현재 단칸방에 거주하고 있는 가구는 총 120만 가구, 비만 오면 침수되는 지하셋방이나 쪽방 등 인간다운 생활을 영위하기 어려운 주택에 거주하고 있는 저소득층이 330만 가구에 달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임대주택 문제도 심각하다. 지난 2월 국회에서 열린 ‘서민 주거 안전망 구축을 위한 서울시 주택 정책토론회’에서 발표한 정해웅 가양 5단지 대표에 따르면 선진국의 경우 전체주택 재고의 최고 36%가 10년 이상 임대되는 공공성 임대주택이지만 우리나라는 2.5%에 불과하다.
정대표는 “재개발사업이나 주거환경개선사업으로 퇴거를 당하는 사람들에게 공급되는 50년 공공임대주택에 동일한 임대료가 적용되고 있는 것과 관련, 소득수준에 따라 임대료를 차등 적용해야 한다”며 “임대주택의 원래 목적 자체가 집 없고 소득이 적은 서민들을 대상으로 하는 만큼, 건설사들의 건설원가보다는 주거여건과 입주자들의 소득 정도를 고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농촌 주거환경도 문제
최근에는 농촌 주택의 열악한 주거 환경도 문제점으로 부각되고 있다.
빈민사목위원회 이강서 신부는 “농촌 지역의 경우 대부분 노인이 거주하고 있어 집이 오래돼도 수리도 못하고 있는 실정”이라며 “과거 도시지역에 한정된 열악한 주거환경 문제가 전국적으로 확산되고 있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이신부는 또 ”임대주택 문제, 재개발 문제, 비닐하우스 문제 등 한국 사회는 수 많은 주택 난제들을 안고 있다“며 ”교회가 어려운 이웃에 대해 열려있는 자세로 주거문제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
한국도시연구소(이사장 김형국)가 대한주택공사의 용역을 받아 제출한 ‘주거환경 개선사업지구 주민의 주거안정 대책에 관한 연구’(2004년 8월)에는 열악한 주거환경을 개선하자는 좋은 취지(?)로 실행되는 재개발 때문에 상처 입는 소외된 서민들의 목소리가 절절하게 담겨 있다.
“윗동네가 개발되고 아파트 생기고 하면서 기가 팍 죽었어요. 안그러겠어요? 여기는 다 하꼬방들인데. 동네가 점점 독거노인촌, 쪽방촌으로 변해가고 있다니까요. 오갈데 없는 사람들만 남아있는 곳이 되어 버렸어요.”(정○○씨, 여 40대, 미개발지역 가옥주)
“주거환경개선사업을 하면서 길 낸다, 뭐 한다 하면서 돈 있는 사람, 젊은 사람들은 보상금 이사비 받아 다 떠났고, 이제 독거노인이나 정말 돈 없어 오갈데 없는 사람들만 남았어요. 동네가 활기가 없고 침체되었어요.
새로 들어오는 사람도 없어요. 아직도 공동화장실쓰는 이런데를 요즘 사람들이누가 들어오겠어요. 빈집도 많아요.”(남 30대, 서울 ○○슈퍼 주인)
◎ “가정해체 막기 위해 주거권 꼭 지켜져야”
서울 빈민사목위 위원장 이강서 신부
주택 보급률 100%가 넘었다. 일인당 국민소득도 이만불 시대가 멀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지난 5월 29일, 판교 택지개발지구 철거세입자 김씨는 임대아파트를 공급받고도 비싼 임대료를 마련하지 못해 음독자살을 시도했다. 한편에서는 주택 양도세를 걱정하고 한편에서는 임대료 때문에 목숨을 잃는 판이다.
서울대교구 빈민사목위원회 위원장 이강서 신부는 “현재 우리나라 주택은 공공성보다는 시장성에 치우쳐 있다”며 “한 사람이 투기를 목적으로 여러 채의 주택을 매입할 경우 다른 편의 주거권의 입지는 좁아진다는 단순한 원리”라고 말했다.
이신부는 실례로 철거민들의 처지를 들었다. 부동산 투기업자 혹은 가옥주들의 틈새 속에서 오랫동안 살던 집을 빼앗긴 철거민들의 주거권은 없다.
그들은 ‘주거권’을 회복하기 위해 뼈를 깎는 투쟁을 한다.
다행히 일이 잘 풀려 공공임대아파트에 거주할 수 있게 됐다고 해도 철거민들 중 대부분은 기초생계비를 밑도는 수입을 가진다. 문제는 그들이 임대아파트의 얼마 되지 않는 보증금을 마련할 방안이 없다는 것이다. 가까스로 보증금을 마련하더라도 소득이 뒷받침되지 못하기 때문에 임대비를 체납한다. 보증금은 까먹게 되고 결국 퇴거당해 비닐하우스, 쪽방을 전전한다.
철거민들의 비닐하우스, 쪽방, 노숙 등은 교회가 외치는 ‘소중한 가정’의 와해를 야기한다.
이신부는 “이러한 관점에서라도 교회의 세포이자 사회의 중심인 가정의 해체를 막기 위해서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주거권이 지켜져야 한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주거권을 지키기 위한 방안은 없을까.
이신부는 ▲소득과 평수에 따른 다양한 공공임대주택 공급 ▲소득증대를 위한 안정적 일자리 창출 등을 꼽았다.
덧붙여 이신부는 “주택은 인간이 가정을 꾸릴 수 있는 기본적인 권리”라며 “토지와 주택은 시장의 논리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닌 신앙의 입장에서 바라봐야 한다”고 말했다.
이신부와의 인터뷰 내내 일반인들이 생각하는 주거권에 대한 거창한 논리는 없었다. 주거권은 그저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집을 가질 수 있는 권리’였던 것이다. (오혜민 기자 gotcha@catholictimes.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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