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기 임대주택 공급 더 늘려야
정부 ‘100만호 건설’ 계획만… 시행은 ‘미지근’
최저주거기준 이하 빈곤층 지원 프로그램도 강화
서울. 1970년대에 청계천 판자촌이 철거됐다. 1980년대에는 목동을 비롯해 사당동, 양평동, 신당동, 창신동, 상계동, 암사동, 오금동 등이 국제체육행사를 이유로 강제 철거됐다. 1990년대에는 금호동, 행당동, 삼양동, 봉천동 등이 모두 철거됐다. 얼마 전에는 마지막 남은 신림동 지역이 재개발 됐다. 서울에는 지금 산동네가 거의 없어졌고 그 자리에 아파트 숲이 들어섰다. 그럼 주거환경도 그만큼 나아졌을까. 현실은 정반대다. 박재천 제정구기념사업회 사무국장은 “아무리 내 집 마련의 꿈을 갖고 있다 하더라도 제대로 일할 수 없는 처지에서는 하늘의 별”이라며 “그만큼 한국사회의 가난한 사람들은 주거고통이 심하다”고 말했다.
■사회의 역할
교회내 주거문제 관계자들은 정부가 단순히 주택 건설과 공급에 그칠 것이 아니라 모든 국민에게 적절한 주거를 제공하는 쪽으로 정책방향을 전환해야 한다고 말한다. 양(量)도 문제이지만, 더 심각한 것은 질(質)이라는 지적이다.
이와관련 전문가들은 우선 최저주거기준 이하 주택에 거주하는 빈곤층에 대한 지원 프로그램을 구체화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미국 영국 일본 등 선진국에서는 이미 오래전부터 인간다운 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최소한의 기준을 정부와 지방자치단체가 마련, 이들 기준 이하 주택에 거주하는 저소득층의 주거수준을 개선하는데 노력해 왔다. 따라서 관계자들은 이러한 선진국의 경험에서 볼 수 있듯이 앞으로는 최저주거기준을 활용, 이 기준 이하의 주택에 거주하는 주민수를 중장기적인 목표하에 줄여나가는데 노력해야 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유영우(토마스) 주거권 실현을 위한 국민연합 사무총장은 “최저주거기준 이하의 주택에 거주하는 주민들을 정기적으로 파악해 정부 지원이 필요한 주거 빈곤층을 명확히 선별, 이들에 대한 장기임대주택 공급이나 주택개보수 자금 지원, 주거환경정비사업 시행 등 각자의 주거상황에 알맞는 차별화된 지원수단을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무엇보다 시급한 것은 장기임대주택 공급을 확충하는 일. 장기임대주택 재고율을 적어도 선진국 수준인 10∼20%로 늘려야 한다는 지적이다. 정부는 앞으로 2012년까지 총 100만호의 국민임대주택을 건설할 계획이지만 현재로선 지지부진한 형편이다.
무엇보다도 주택문제는 결코 간과할 수 없는 경제문제이자 사회문제라는 차원에서 접근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주거빈곤층의 주거불안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진정한 복지사회에 진입하기는 힘들다는 점에서 지금이야말로 주거복지 지원을 강화하는데 관심을 기울여야 할 때라는 것이다.
■교회의 역할
교회는 인간의 기본권리로서의 주거권에 대해 수없이 강조해왔다. 현대 세계의 교회에 관한 사목 헌장 ‘기쁨과 희망’(Gaudium Et Spes)은 “공권력이 주거빈곤층을 단순한 생산 도구가 아니라 인간으로 여겨야 하며, 가족들을 그들 곁에 불러 합당한 주거를 마련할 수 있도록 도와 주어야 하고 현지 민족이나 지역의 사회 생활에 참여할 수 있도록 보살펴 주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66항)
사회교리에서도 “모든 인간은 정치적, 법적(투표, 의사표현의 자유, 거주이전의 자유) 그리고 사회 경제적(음식, 주거, 노동, 교육) 권리를 지니고 있다”며 “이 권리들은 공동체 안에서 실현되어야 하며 사회의 모든 제도들로 부터 인간의 권리를 보호해야 한다”고 밝히고 있다.(지상의 평화)
사회 교리는 특별히 가난한 이들을 우선적으로 선택하고 있다. 그래서 교회는 가난한 이들에게 우선적인 사랑을 드러내고자 한다. 그만큼 가난한 이들의 필요와 권리들을 하느님의 눈으로 특별히 주의를 기울이고 있는 것이다.
주택에 대한 교회 가르침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1997년 사순시기 담화에 압축돼 있다. 요한 바오로 2세는 이 담화를 통해 “‘집 없는 그리스도를 가까이 모시라’는 복음의 요구는 모든 사람에게 자신의 삶을 되짚어보고 형제자매들 고통과 어려움을 함께 나누며 연대를 실천하라는 촉구”라는 것을 강조하고, “가난한 이들의 울부짖음을 들어주시는 하느님 부르심에 응답해야한다”고 촉구했다.
서울대교구 빈민사목위원회(위원장 이강서 신부)도 지난해 12월 성탄을 맞으며 발표한 담화에서 “토지나 주택 과다보유와 투기 등으로 재산을 증식하는 일은 집 없는 가난한 이들을 더 고통스럽게 하는 악한 행위”라며 “우리 신앙인들은 ‘현 시점의 심각성과 각자의 개인적 책임의 심각성을 깨닫도록 가난한 이들에 대한 우선적 사랑과 연대의식에서 우러난 대책을 강구’(사회적 관심 47항)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신앙인들이 신앙적 입장에서 가난한 이들의 주거 문제에 대해 희생적으로 나서야 한다는 지적이다. 이와관련 IMF 당시 서울 옥수동본당 신자들이 전세금을 올려 받지 않기로 결의한 것은 지금까지 좋은 모범으로 남아있다.
이점에서 주수욱 신부(프라도 사제회 한국책임자)의 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우리사회의 누구나 ‘가난한 삶’을 향해 살 수 있어야 합니다.
무조건 돈 벌어서 쓰고 보자는 심사는 자연을 파괴할 뿐 아니라 자원을 고갈시키고 인간을 돈으로밖에 취급하지 않습니다. 최소한의 삶의 조건을 위해서 조심스럽게 쓰고 사는 것이 인간의 도리이며 참 인간이 되는 길이면서 참 생명을 가지는 것입니다. 이 같은 삶이 지금 우리사회의 ‘가난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극복할 수 있는 길입니다. 가난의 문제는 가난한 삶을 통해서 치유될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합니다. ‘파이’를 키워서 가난의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양극화해소 논리는 그래서 허구입니다. 가난한 삶을 통해서 해결할 수 있습니다. 교회는 가난해 져야 합니다.”
강우일 주교(현 제주교구장)는 1999년 서울시 관악구 봉천 3동 7-2지구 재개발 지역에서 미사를 봉헌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인간들이 마음만 올바로 먹으면, 모두 나눌 줄 알면 다 따뜻하고 아름답게 의좋게 살 수 있는 재화를 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욕심 때문에….”
“재산증식 수단 아닌 나눔 정신으로 봐야”
■유영우 주거권 실현을 위한 국민연합 사무총장
집값이 널을 뛴다.
8.31 정책을 믿었던 사람은 바보가 됐고 정부는 1년여만에 11.15 정책을 내놓았다.
국민들은 정부의 주택정책을 두 번 다시 믿지 않겠다고 말한다. 누가 이들을 바보로 만들었는가?
유영우 주거권 실현을 위한 국민연합 사무총장은 “단기간에 효과를 보려는 정부의 주택정책은 실효성이 없다”며 “중장기적인 대책을 세워 본질적인 문제에 접근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가 강조하는 주택의 본질적인 문제는 주거권에 대한 ‘개념’이다.
주택을 재산 증식의 소유로 생각하는 요즘 세태는 물론 꼭 자가 소유여야만 한다는 국민의식이 문제라는 뜻이다.
하지만 남들은 모두 주택을 통해 막대한 돈을 벌어들이는데 내 집은 싼값에 팔아넘길 수 없는 일이다.
때문에 유사무총장은 “사회의 여러 지도층들이 솔선수범해야 할 것”이라며 “주거권에 대한 목소리는 나눔의 정신을 가진 가톨릭이 나아가야 할 방향과도 일치한다”고 말했다.
그는 또 “가톨릭이 종교적 신념을 갖고 사회에 메시지를 던져 정화의 역할을 한다면 가장 낮은 곳에 임한다는 그리스도의 정신을 따르는 것이 아니겠는가”라고 덧붙였다.
그동안 한국 주택 시장은 수요와 공급을 통한 균형잡힌 가격 형성이 아닌 기형적인 형태로 자라왔다. 기존의 주택 부지에 신분양 아파트가 건설되면서 서로가 서로의 주택 시세를 올리는 악순환이 반복됐던 것이다.
유사무총장은 주택 시세 악순환의 고리를 끊기 위해서라도 ▲시장의 투명성 확보 ▲분양가 인하 정책 ▲계속적인 임대아파트 공급 ▲청약가점제의 빠른 도입 등을 통해 중산층이라는 잠재적 수요계층도 활발히 움직일 수 있게 이끌어야한다고 말했다.
그는 “이러한 주택문제 대안들은 앞서 언급했던 주택에 대한 개념 바꾸기와 함께 맞물려 가야 한다”며 “정부는 국민들이 자가주택이라는 개념에서 벗어나 임대아파트에 살면서도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장기저리고정금리, 저소득층 임대 보조 등 대안을 마련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주택문제는 단순히 주택차원에서 끝나지 않는다. 국민들은 자고 일어나면 뛰는 집값을 걱정하느라 경제활동에 적극 매진할 수 없으며 주택을 구하지 못한 1세대는 가난을 2세대에 대물림한다.
유사무총장은 “근시안적인 주거대책으로는 몇백년이 지나도 악순환의 고리를 끊지 못할 것”이라며 “다음 세대까지 미치는 파장에 대한 깊이있는 통찰과 다각적 검토가 이루어지기를 바란다”고 당부했다.(오혜민 기자 gotcha@catholictimes.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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