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관 성 베네딕도 수도원 10년 이상 노력
독일 성 오틸리엔 수도원 “영구임대” 결정
“교회정신 모범” … 2009년 일반에 공개
조선시대 대표 화가 겸재 정선(1676∼1759)의 그림 21점이 80여년만에 한국에 돌아왔다.
선지훈 신부(분도출판사 사장)는 지난달 22일 인터뷰를 통해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은 지난해 9월 독일 성 오틸리엔 수도원으로부터 겸재 정선의 작품을 영구 임대 받았다”며 “오틸리엔 수도원의 한국 진출 100주년이 되는 2009년에 일반에 공개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화첩 형태로 돌아온 겸재의 그림은 1925년 한국을 방문한 노르베르트 베버 당시 성 오틸리엔 수도원장이 수집해간 것으로 금강산 구룡폭포를 그린 ‘구룡폭’, 조선시대 이성계가 거주했던 함경도 함흥의 궁궐에 있던 소나무를 그린 ‘함흥본궁송’ 등이 포함돼 있다.
이번 환수 결정은 성 오틸리엔 수도원(원장 예레미아스 슈뢰더 아빠스)의 역할이 컸다. 오틸리엔 수도원은 한국에 베네딕도회를 소개한 수도회로서 1909년 소속 선교사들이 서울 혜화동에 수도원을 세운 것이 현재의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의 시작이다.
오틸리엔 수도원은 겸재의 작품을 수도원 내에 보관 하고 있던 중에 1990년대 초 수도원에 묵으며 독일 유학을 하던 선지훈 신부가 겸재의 화첩을 접했고, 이후 성 오틸리엔 수도원과 왜관수도원은 겸재 작품의 환수에 대해 적극적으로 논의 했다.
결국 성 오틸리엔 수도원은 선교 100주년을 앞두고 교회 정신에 입각해 영구 임대를 결심하게 됐다. 수도원 측이 이 같은 결심을 한 직접적인 계기는 미술품 경매업체인 크리스티와 소더비가 겸재 작품에 눈독을 들였기 때문.
수도원 측 관계자에 따르면 “경매업체에 넘길 생각은 절대 없었다”며 “이같은 경매업체의 적극적인 권유가 오히려 한국에 중요한 의미를 갖는 문화재를 돌려줘야 한다는 공감대 형성으로 이어졌다”고 했다.
성 오틸리엔 수도원은 겸재의 작품을 영구 임대 하면서 두 가지 조건을 내걸었다.
왜관수도원에 작품을 손상하지 않는 특수 보관시설을 갖출 것과 작품의 모사본을 제작해 오틸리엔 수도원에 돌려주는 것이었다.
선신부는 이에 대해 “우선 영구 임대 조건대로 빠른 시일내에 모사본을 제작해 오틸리엔 수도원 측에 제공할 것”이라며 “도록 발간이나 화첩을 1점씩 분해 할 수 있는지의 여부 등을 알아볼 것”이라고 말했다.
또 특수 보관시설에 대해서는 “대기업이나 지방자치단체 등과 협의해 왜관수도원 인근에 2개의 작은 박물관을 건립하고 싶다”며 “만약 가능하다면 한곳에는 작품 중심으로 다른 한 곳에는 오틸리엔과 왜관 수도원의 역사와 생활 등을 전시해 놓고 싶다”고 밝혔다.
이번 겸재 작품의 영구 임대는 ‘북관대첩비’, ‘조선왕조실록’ 등에 이어 민간의 노력으로 이뤄진 우리나라 문화재 환수라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유홍준 문화재청장은 “사진으로만 봤던 겸재의 작품을 직접 감상할 기회가 생겨 매우 반가운 일”이라며 “실경도, 정형산수 등 겸재의 다양한 화풍은 국보, 보물급 문화재로 부르기에 큰 무리가 없다”고 말했다.
특히 이번 결정은 프랑스 측이 외규장각 문서를 돌려주겠다던 약속을 어긴 채 계속 무성의한 태도를 보이고 있는 것과는 극히 대조적이며 해외에 반출된 문화재를 의미 있게 반환한 선례로 기록됐다.
▶ 겸재 작품 수집한 베버 아빠스는 누구?
겸재 정선의 작품을 수집해갔던 노르베르트 베버 아빠스(1870~1956)는 성 오틸리엔 수도원의 초대 원장이었다. 32세의 젊은 나이에 원장으로 선출된 베버 아빠스는 당시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던 수도회를 훌륭하게 이끈 지도자였다.
그의 선교사상은 선교지 민족들의 사회·문화적인 발전을 위한 노력을 병행해야 한다는 것에 주안점을 두고 있었다. 또한 그는 탁월한 저술가이면서 재능과 감각이 뛰어난 예술가이기도 했다.
1911년 2월 베버 아빠스는 조선을 직접 방문해 약 4개월 간 머물며 유서 깊은 명소들과 교회를 두루 둘러보았다. 그 후 1914년 6월 독일에서 ‘조용한 아침의 나라에서’라는 제목의 여행기를 발간했다. 이 책은 당시 1910년대 중반에 조선을 유럽에 알렸다는 점에서뿐만 아니라 내용적인 면에서도 민속학적 가치가 높이 평가된다.
특히 1927년 ‘금강산에서‘라는 책을 발간, 금강산의 아름다움을 극찬했다. 이 책에는 한국 최초의 진경산수화가인 겸재 정선의 금강산 그림 두 점도 소개되어 있다. 베버 아빠스는 겸재 그림의 회화사적 가치를 발견한 최초의 인물이다.
베버 아빠스는 조선과 조선인에 대해 항상 좋은 감정을 갖고 호혜적인 선교 정책을 펼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것은 그 자신이 두 번이나 직접 조선을 방문하여 조선의 문화보존을 위해 노력했고, 그가 조선으로 파견한 선교사들 중에는 한국 문화와 언어를 연구한 학자들이 많았다는 점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그의 조선 문화 보존 활동은 서서히 식민지화 되어 가는 ‘조용한 아침의 나라’에 대한 선각자적인 사랑인 동시에 선교사로서의 교회 정신에 입각한 사랑을 실천한 것이라 할 수 있다.
▶ 오틸리엔 수도원과 왜관 수도원의 인연
성 베네딕도회 오틸리엔 연합회의 한국 진출은 당시 조선교구장인 뮈텔 주교의 요청에 의한 것으로, 1909년 2월 사우어 신부 등 2명의 수도 신부가 내한해 서울 혜화동에서 활동함으로써 시작됐다. 이후 함경남도 덕원을 거쳐 경상북도 왜관에 정착할 때까지 많은 어려움과 수난을 겪었다.
1909년부터 1927년까지 혜화동에 수도원을 건립했으며 1927년 함경남도 덕원에 새 수도원을 건립해 생활했고 1928년에는 중국 연길에도 수도원을 세웠다.
이후 한국전쟁을 전후해 모두 폐쇄되었다. 1955년 왜관에 수도원 건물을 세웠고 그간 덕원과 연길교구 소속 선교사들이 다시 내한함에 따라 수도원은 로마로부터 정식 수도원으로 인가를 받았다.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은 현재 여러 가지 활동을 통해 교회와 지역사회에 봉사하고 있다.
작품설명
▶행단고슬(杏壇鼓瑟) 공자가 제자들을 거느리고 은행나무가 있는 단상에서 거문고 연주를 감상하고 있다. (29×23.2㎝)
▶노재상한취(老宰相閑趣) 늙은 재상이 한가하게 즐기고 있는 모습을 그린 작품. (29×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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