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께 받은 은총 이젠 나누고 싶어요”
국제 장애인 기능 올림픽대회서 금상 수상
영세 후 처음으로 직장 구해 삶의 기쁨 체험
컴퓨터 수리점 내고 무료 컴퓨터 교육 실시
“저 무늬만 장애인이에요. 특별한 게 하나도 없는 사람인데요.…. 너무 부끄러워서….”
전화기를 붙들고 한사코 취재를 만류하던 황의석(메모리오.40.청주교구 부강본당)씨. 완강하게 손사래를 쳐대는 모습을 머릿속으로 그리며 찾은 황씨는 괜한 일로 먼 걸음을 하게 한 것 같다며 자신의 컴퓨터 수리점 앞에서 기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조그만 마을에 하나뿐인 컴퓨터 수리점이라 어렵지 않게 찾은 그의 가게는 겉보기엔 어느 도시의 거리에서나 볼 수 있는 여느 점포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서너 평 남짓한 수리점으로 들어서자 가게 내부는 그의 손에 해부당해 여기저기 널려 있는 컴퓨터들로 조금은 번잡하다는 느낌을 갖게 했다. 사람들의 눈길을 의식해 많은 손길이 닿을 법한 여느 가게들과는 다른 면이기도 했다.
“너무 정신이 없죠?”
쑥스러움이 담긴 그의 웃음에서는 미안함이 묻어났다. 전화로 전해져 오던 밝고 힘찬 목소리가 꼭 들어맞을 정도로 해맑은 얼굴로 사람을 대하는 황씨와 잠시만 마주앉아 있다 보면 그가 휠체어에 의지해야 하는 1급 지체장애인이라는 사실을 까맣게 잊고 만다.
“조금만 더 빨리 하느님을 알았더라면….”
말끝을 흐리며 벽에 걸린 십자가를 바라보는 황씨의 얼굴에서는 잔잔한 물결이 일었다. 지난 1997년에야 느지감치 세례를 받고 주님의 길에 들어선 황씨의 삶은 그의 말대로 전쟁같은 것이었다. 첫 돌을 지내고 소아마비를 앓아 그 때 이후로 걸어본 기억이 없다는 그는 장애에도 불구하고 또래 친구들과 똑같은 길을 걸었다. 동네 친구들이 초등학교에 입학하면 그도 학교를 다녔고 이후로도 마찬가지였다. 그 때마다 친구들은 자진해서 도우미가 되어주었다. 대전의 일반 고등학교를 진학해서도 학교의 배려로 자신이 속한 학급이 1층으로 배정된 덕에 그리 어렵지 않게 학창시절을 보낼 수 있었다.
“저는 참 복이 많은 것 같아요. 지금 생각해보면 그 또한 하느님의 이끄심이 아니었던가 싶어요.”
문제는 고등학교를 졸업하면서부터였다. 상위권 성적을 유지하던 황씨는 건축공학을 전공하고 싶었지만 당시만 하더라도 공대에선 장애인을 아예 받지 않는 곳이 대부분이었다. 그런 사정을 누구 못지않게 잘 아는 누나가 자연과학대에 속해 있던 전산학과에 원서를 내는 바람에 그의 길은 의도하지 않았던 방향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한 교실에서 수업을 듣던 고등학교 시절과는 달리 장애인을 위한 편의시설이라곤 찾아보기 힘들던 대학교 4년간은 전쟁이나 마찬가지였다. 입학 후 한동안은 어머니 등에 업혀 학교를 다니다 학교생활이 익숙해질 무렵에는 친구들의 도움으로 강의실과 화장실 등을 전전해야 했다.
“당시는 강의를 듣는 일 외에 다른 일은 사치로 여겨질 정도였지요.”
힘들게 대학을 졸업하고 나자 더 큰 어려움이 닥쳐왔다. 대부분의 친구들이 졸업과 동시에 추천으로 취업이 되는 동안 황씨는 이곳저곳에서 특채 의뢰가 들어와도 면접에서 고배를 들기 일쑤였다. 목표가 사라지니 공황상태에 빠져들게 되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다행이랄까, 그의 모습을 지켜봐온 주위의 도움으로 과외교사를 하며 후일을 기약할 수 있었다.
그런 황씨에게 새로운 계기가 찾아온 건 1994년이었다. 불현듯 주위로부터 도움만 받는 입장에서 홀로서기를 해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면서 한 번도 시도해보지 않았던 집 떠나기를 감행키로 한 것이다. 자신의 전공을 살려보기 위해 찾은 곳이 경기도 일산직업훈련원이었다. 새로운 목표가 생겼기 때문일까, 그 해 연말에는 이듬해 오스트레일리아 퍼스에서 열리는 제4회 국제장애인기능올림픽대회에 참가할 한국대표단에 선발됐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뜻하지 않은 복병을 만나게 됐다. 계속 휠체어에 앉아서 지내다 보니 척추가 많이 휘어 수술을 받아야만 한다는 진단을 받은 것이다.
대회를 앞두고 합숙훈련에 들어가야 할 시점이 얼마 남지 않았지만 더 미룰 수 없다는 의사의 말에 대수술을 받고 꼬박 석달을 누워서 지내야 했다. 어렵사리 건강을 회복한 후 대회 준비에 매달렸다.
“제 딴에는 그때까지 무신론자로 살아왔다고 생각했지만 제 맘 한켠에 이미 하느님께서 들어와 계셨던 것 같아요. 절대적인 존재께서 주신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으니까요.”
1995년 가을 난생 처음 비행기를 타고 설레는 마음으로 임했던 대회, 모든 걸 어떤 절대자에 맡기고 임한 결과는 컴퓨터프로그래밍부문 최고 영예인 금상 수상으로 나타났다. 우리나라가 1위를 하는데 한몫을 한 공로로 그해 말 동탑산업훈장까지 받았다.
이 일이 계기가 돼 황씨는 이듬해 제 발로 성당을 찾았다. 비슷한 시기 나이 서른에 처음으로 번듯한 직장도 잡게 됐다. 회사의 전산 업무에 회계, 총무일까지 맡아보며 동료들의 인정도 받았다.
“일하는 게 그렇게 즐거울 수 없었어요.”
교회와 인연을 맺으며 황씨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 또 한번 달라지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이제는 지금껏 받아온 것들을 나눠야겠다는 생각이 깊어진 것이다. 그래서 이때부터 나선 일이 무료 컴퓨터교육이다. 주위에서 컴퓨터를 배우고 싶어도 여건이 안 되는 이들이 있으면 직접 찾아다니며 자신의 노하우를 전수했다. 한 팔밖에 쓰지 못하는 장애인을 위해서는 그에 맞는 타자법을 가르치고 동영상을 보고 싶어하는 이에게는 그에 맞는 프로그래밍법을 교육시켰다. 주위에서는 돈도 안 되는 일을 왜 하냐는 소리가 있었지만 한주도 빠지지 않고 자신을 필요로 하는 이들을 찾아다녔다.
“컴퓨터를 통해 새로운 세상에 눈을 뜨고 기뻐하는 이들을 만날 때의 기쁨이란 어떻게 표현하기 힘들 것 같아요.”
사회로부터 받은 게 많아 이제는 돌려주고 싶다는 생각에서 마음이 떠나지 않던 차에 올 5월 큰 마음을 먹고 저지른 일이 지금 운영하고 있는 컴퓨터 수리점을 내는 일이었다. 자신의 일을 하며 좀 더 많은 이를 도울 수 있는 여유를 갖고 싶어서였다. 대출금을 갚기도 빠듯한 수입이지만 황씨는 10년 가까이 이어오고 있는 컴퓨터 무료교육을 확대하고픈 마음뿐이다.
불편한 몸에도 불구하고 나누고자 하는 마음에 본당의 자질구레한 일을 도맡아 하는 바오로회에도 들어 성당 청소며 관리 등에도 열심이다. 바오로회 권병우(요한 보스코.53) 회장은 “본당에 노인이 많아 일손이 부족하던 차에 열성적으로 나서는 황씨의 모습이 다른 이들에게도 격려와 자극이 되는 것 같다”며 “자신의 어려움에도 개의치 않고 주위 사람들과 나누려고 하는 행동이 간접 선교에도 도움이 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주일날 성당에서 미사를 드리는 시간을 제외하곤 일주일 내내 가게 문을 여는 황씨는 독특한 고객관리로 마을 사람들의 호평을 얻고 있다.
여느 사람들처럼 그저 손님이 원하는 대로 컴퓨터를 수리하고 부품을 파는데 그치지 않고 찾아온 손님이 혼자서 컴퓨터를 고치고 부품을 설치할 수 있는 방법까지 가르쳐주면서 컴퓨터와 가까워질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또 고객의 필요와 여건에 맞는 컴퓨터를 권해 소비자에게 큰 부담이 되지 않도록 하는 등 마치 자신의 가족처럼 대한다. 이런 이유로 한번 그의 가게를 찾은 사람은 이내 단골이 되고 만다.
또한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장애인 인권과 복지에도 관심을 돌려 장애인들의 권익을 위해 할 수 있는 몫을 찾고 있다.
이러다 보니 그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들도 하나둘 늘어나 근래 들어서는 자문을 구하고 도움을 청하는 이들의 일부터 먼저 챙기느라 자신의 일은 뒷전으로 밀리기 일쑤다.
“삶의 의욕을 잃고 지내는 장애인들이 많습니다. 그런 이들의 의욕을 다시 불러일으키고 저보다 조금이라도 빨리 하느님께로 나아갈 수 있도록 돕는데 힘이 된다면 좋겠습니다.”
단체의 도움 요청을 불쑥 받아들였다가 2층에 사무실을 두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난감해하는 황씨, 그래도 용감하게 가게 문을 나서는 그의 모습이 아름답게까지 보인다.
일반인들로서는 평범하기 그지없는 일상을 찾기 위해 황씨가 걸어온 길을 되새기다 보면 평범함이, 그리고 그 속에서의 나눔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깨닫게 된다.
사진설명
▶황씨는 삶의 의욕을 잃고 사는 장애인들이 빨리 하느님을 만나도록 돕고 싶다고 말했다.
▶황의석씨는 고객에게 컴퓨터 수리 방법을 직접 가르쳐 주는 등 자신의 가족처럼 대하고 있다. 그래서 한번 찾은 고객은 단골이 되고 만다.
특집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