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의 사람들이 사막을 찾는 데는 이유가 있다. 그들은 황무지에서 시체처럼 살면서 하느님의 영을 맞아들이고 싶어하였다. 그들 자신이 하느님의 거처가 되어서, 저 황무지를 사람들이 살 만한 땅으로 일구어 갈 꿈을 품고 살았다.
그러면 세상 사람들이 이것을 보고 하느님의 영이 하시는 일은 안 되는 것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리라는 믿음과 희망을 갖고.
우리 시대에 ‘시체처럼’ 자기를 낮추어 세상을 세우는 영으로 이 세상의 생명의 질을 높이기 위하여 투신한 신학적 흔적으로 가장 주목할 것이 지난번에 언급한 제2차 바티칸공의회이다.
우리는 2002년에 제2차 바티칸공의회 개최 40주년을 맞았고, 2005년에는 공의회 폐막 40주년과 함께 특히 사목헌장 반포 40주년을 경축하였다.
이 공의회를 지켜 간 교황 바오로 6세는 현대 세계에서 교회가 어떤 존재일 수 있는가를 드러낸 가장 중요한 문헌 가운데 하나로 평가받아 온 역사적인 회칙, ‘민족들의 발전’을 반포하였다. 2007년에는 바오로 6세가 이 문헌을 발표한 지 40년이 되는 뜻깊은 해이다.
우리 교회에서도 ‘시체처럼’의 영으로 민족의 생명의 질을 하느님의 다스림에 부합한 것으로 승화하기 위한 구체적인 투신들이 있어 왔다.
지난 2004년 9월에는 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 창립 30주년을 맞았고, 올해에는 가톨릭농민회가 40돌을 경축하였다. 2008년에는 가톨릭노동청년회가 50주년을 맞는다.
이 같은 투신과 관련하여 2008년에 40주년을 맞는 평신도사도직협의회와 1970년에 창립된 정의평화위원회 등의 활동 역시 주목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단체들은 민족의 고난의 현장에서 하느님의 생명의 질서를 민족과 함께 질문하고 하느님의 정의의 다스림과 섬김을 온영과 온몸으로 증거 하고자 헌신하였다.
그리하여 당대에 목소리를 잃어버렸던 가난한 이들과 독재 정권에 의해 억눌려 있으면서도 자신들의 양심을 지켜 갔던 지식인과 학생들이 하느님의 살리는 질서를 질문할 능력을 회복하는 데 중요한 계기를 열어 주었다.
구체적으로, 긴급조치를 앞세운 고박정희 대통령의 정치적, 법적 폭력 앞에서 이들이 보인 다양한 투신을 한 예로 들 수 있을 것이다.
1973년 12월 24일에 장준하, 함석헌 등 민주인사들과 김수환 추기경과 지학순 주교, 김지하 등이 ‘현행헌법개정 백만인 청원운동본부’를 결성하고 독재 체제에 대한 시민 저항을 조직화해 간 적이 있었다.
이것을 막기 위해서 급조된 것이 이른바 ‘긴급조치법’이었는데, 1974년 1월에 1호와 2호가 내려지고 다음해 5월에 9호가 발동되었다. 이후 박정희 대통령이 피살당할 때까지도 긴급조치 9호 체제가 지속되었다.
이 체제하에서는 요즘 여당과 야당, 그리고 일간 신문들이 일정하게 누리는 것과 같은 비판의 자유란 존재하지 않았다.‘개헌’이라는 말만 해도 붙들려 갈 판이었으니까.
이런 시대 상황에서 사제단과 가농, 가노청 등의 단체들은 그야말로 온몸으로 하느님의 사랑과 정의와 섬김과 평화를 증거 하는데 앞장섰다.(‘한국천주교회사’ 한국천주교회총람 1995~2003,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04, 404; 기쁨과희망사목연구원편, 암흑속의 횃불 1~3권 참조)
이를테면 이 단체들은 당대에 우리의 민중 속에서 하느님의 다스림을 자신의 몸으로 매개한 마리아의 동반자요 그분의 다스림을 시체가 되기까지 온몸으로 선포한 예수 그리스도의 형제자매와 같은 존재였다.
이들에게는 민족의 고난의 현장이야말로 하느님께서 당신의 생명의 다스림으로 저들을 부르시는 신호와도 같았다. 이들은 그 부름에 답하여 시체처럼, 북처럼 자기의 자리를 고집하지 않고 자기를 비워 가면서, 하느님의 메시지를 발생시키는 일에 투신하였다.
그리하여 특히 1970년대와 80년대에 바티칸공의회와 이 공의회를 이끈 두 교황, 요한 23세와 바오로 6세의 세계에 열린 복음화 비전에 따라 이땅에서 민족과 신앙 공동체를 살릴 영의 에너지를 생성하는 데 기여하였다.
초세기에 바오로 사도가 그랬던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시체처럼’의 영 안에서 자신들의 약함을 자랑해 가면서.
황종렬(미래사목연구소 복음화연구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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