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 열심히 살았건만
폐렴으로 숨이 가빠지는
증세로 죽을날만 기다리네
전국 5만명 진폐증 환자 고통에 신음
산재 혜택 못받고 찬밥신세로 전락
이동차량서비·호스피스 봉사 절실
[전문] 지난 9월 서울 면목동 녹색병원 62병동 22호실. ‘뜨개질하는 진폐증 환자 할아버지들’(9월 24일자)을 취재한지 3달여 만에 또 한분이 선종했다. 추운 겨울, 마당에 들여놓았던 연탄 100장의 흐뭇함이 우리 기억에서 지워질 때 노령의 광부도 그렇게 세상을 등졌다.
전국 집계 진폐증환자 5만명. 적지않은 그 숫자를 기억에서 놓지 않기 위해 짐을 꾸려 강원도로 떠났다.
#검은 어둠 사이로
강원도 영월, 사북을 거쳐 고한, 정선, 그리고 태백. 차창 밖으로 내다보이는 강원도 풍경도 그새 많이 변했다. 2~3년 전만해도 다닥다닥 붙어있던 탄광 판자촌은 사라지고 스키 리조트 현수막과 강원랜드 카지노 깃발만이 나부꼈다. 서울에서 3시간거리인 태백에 도착하자마자 재가 진폐환자들의 집을 방문하기로 했다. 60~70년대 ‘산업역군’으로 추앙받았던 광부들은 현재 강원도 일대를 떠나지 못하고 쓰다버린 연탄재처럼 머물러 있다.
태백의 한 주공아파트. 손님 마중을 위해 한 할머니가 문 앞까지 나와 있다. 남편 김정배(69) 할아버지는 몸을 반쯤 일으켜 세운 것이 전부다.
그는 66년 경북 의성에서 ‘쌀밥’을 찾아 강원도로 올라왔다. 70년대 농협 월급 9만 8천원에 비해 20만원이라는 광부 월급으로는 ‘쌀밥’을 살 수 있었기 때문이다.
“물도 없어서 시커먼 석탄물에 씻고 그랬어요. 착암기와 발파 소리에 그 좋던 청력도 잃고…. 이제는 숨만 가빠요.”
할아버지의 얼굴에는 지난날의 세월을 말해주듯 석탄 때가 까맣게 박혀있다. 방 뒤편으로는 약들이 즐비하고 옆에는 객담을 받아내는 가래통이 놓여 있었다.
“진폐법. 이게 문제거든. 죽은 다음에 유족급여가 나오면 뭘 해요. 현재 돈벌이가 없는데 생활급여가 나와야 뭐라도 먹고 살지요.”
현재 정부는 진폐증 자체로는 산재 혜택을 주지 않고 있다. 대신 폐결핵과 흉막염, 기관지염, 기관지확장증, 기흉, 폐기종, 폐성심, 원발성 폐암, 마이코박테리아 감염 등 9종의 합병증을 가진 환자들에게 일정한 도움을 주고 있는 상태다. 하지만 진폐증 환자들이 가장 많이 걸리는 ‘폐렴’은 합병증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이 문제다. 환자들은 현재 진폐법에 대한 불신과 분노로 가득 차 있었다. 그들은 “갱이 무너지고 가스가 터져 죽은 친구들 끌어낸 일을 생각하면 못할 일이 없다”고 입을 모았다.
동원탄좌에서 20년 가까이 일하고 89년 진폐판정을 받은 홍성민(77) 할아버지는 호흡곤란으로 걷지도 못한다. 지난해에는 노인성 질환까지 겹쳐 ‘황천길’ 구경을 했지만 진폐법이 무엇인지, 어떻게 혜택을 받아야하는지 전혀 모르는 상태다.
“내가 아프니 안 사람이 밭 매서 벌어먹어요. 우리 식구 아니면 난 벌써 갔지…. 고마워. 고마워.”
#다시 사랑을 전하며
강원도 인구 대다수가 탄광에 종사했다는 말은 틀리지 않았다. 같은 단지 아파트에도 또 다른 진폐증 환자가 산다는 소식이었다.
정희자(아녜스.62.원주교구 장성본당)씨. 진폐증에 걸린 남편 이종호(요셉.68)씨는 건강악화로 현재 서울 중앙병원에 입원해 있었다. 남편이 떠난 후 홀로 강원도에 남아 외로움과 분노로 매일을 보낼 것이라 생각했던 기자의 예상은 빗나갔다.
“저희는 강원도 토백이래요. 여기까지 어떻게 오셨드래요?” 구수한 강원도 사투리와 환한 웃음으로 기자를 맞는 정씨.
그에게도 절망은 있었다. 남편이 탄광에서 허리를 다친 지 얼마 되지 않아 ‘밥줄’이었던 탄광도 문을 닫은 것이다.
정씨는 방황을 거듭했다. 그러던 중, 현재의 대모를 만났다.
“남편이 노동운동하면서 자식들 돌반지까지 팔아 뒷바라지 했을 때는 너무나 속이 상했어요. 하지만 천주교를 알면서부터 기도했지요. 하느님이 계시다면 저희를 버리지 말아달라고요.”
그는 더 이상 현실과 사회를 탓하지 않는다. 어려운 형편에도 불구하고 장성본당 레지오 단장과 철암공소 성모회장을 맡아 어려운 이웃을 돕는 등 하느님과의 끈을 놓지 않고 있었다.
“저희는 돈은 없어도 하느님 은총으로 기쁘게 살고 있어요. 저희보다 더 아프고 어려운 진폐환자들을 위해서 노력해주세요.”
현재 서울대교구 노동사목위원회(위원장 허윤진 신부)는 산하단체인 산재사목을 통해 진폐환자들에게 각별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하지만 지역적인 위치가 멀고 담당 봉사자와 재정 부족으로 인해 많은 어려움을 안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위원장 허윤진 신부는 “재가 진폐환자들은 현실에서 ‘잊혀진 사람들’이 됐다”며 “진폐환자들을 위한 이동차량서비스나 호스피스 봉사 등에 많은 관심을 가져달라”고 당부했다.
※문의 02-953-0468
#기자의 막장 체험기
어둠과 싸우며 8시간 노동
마스크를 입에 대지 않겠다는 다짐은 단번에 무너졌다.
1960년 우리 아버지들이 막장에 들어가기 전, 수건으로 입과 코를 동여맨 채 카바이드 불을 비추었던 그 느낌을 체험하고 싶었다. 하지만 엘리베이터가 지하 900M에 달할 때 쯤 기자는 슬그머니 마스크를 썼다.
지열 30℃, 습도 90%. 지하수가 스며들어 바닥은 미끄러웠다. 조심조심 허리를 굽히고 계단을 밟으며 막장으로 내려간다.
개미굴처럼 파여진 막장을 통해 듣는 발파소리와 굴진소리. 1시간을 간 그 끝에는 채탄을 하고 있는 선탄부가 있었다. 선탄부는 “오늘은 마른 탄이 나오지 않아 분진이 거의 날리지 않는다”며 “운이 좋다”고 말했다.
얼굴은 새카맣게 변했고 땀은 비오듯 쏟아진다. 안전모에 달린 불빛에 의지하며 어두움과 두려움을 애써 몰아낸다. 예전보다는 시설이 많이 나아졌다지만 막장 안에서 밥을 먹고 8시간을 일한다는 사실은 여전히 놀라웠다.
생명을 걸고 우리의 겨울을 따뜻이 감싸주었던 그들을 위해 이제 지역 교회는 물론 전국민이 따스한 관심을 보내야 할 때다.
사진설명
▶강원도 태백시 철암 저탄장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마을은 평화롭기만 하다. 오래 전 이곳에 살던 사람들은 바람에 날려오는 석탄가루도 아까워 연탄으로 찍어 사용했다.
▶땀이 비오듯 쏟아지는 막장에서 광부가 작업을 하고 있다.
▶진폐증 환자 김정배 할아버지는 현재 많은 약을 복용하며 힘겹게 살고 있다.
특집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