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열의 땅에서 일치의 걸음 내딛다
천주교·개신교 지도자 등 20여명 10일간
스위스 제네바 등 종교개혁 역사현장 방문
‘주님께서 함께 해주시어 우리 발걸음을 가볍게 해주시고 성령께서 우리 마음을 움직여 주시어 우리 안에서 당신의 뜻을 이루시도록 이끄소서.’
한국 교회 역사상 처음으로 12월 9일부터 18일까지 열흘간 그리스도인 일치를 위한 에큐메니컬(교회일치) 국제 순례에 나선 천주교와 개신교 지도자들의 가슴에서는 한순간도 간절한 기도가 떠나지 않는 듯했다.
주교회의 교회일치와 종교간대화위원회(위원장 김희중 주교)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 일치위원회가 세계교회의 일치운동 경험을 배움으로써 새로운 발전적 계기를 찾기 위해 마련한 에큐메니컬 순례의 첫 기착지는 스위스 제네바. 독일과 함께 종교개혁의 근원지였던 스위스에서도 칼뱅(John Calvin)의 주활동 무대였던 이유로 종교개혁 역사의 박물관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제네바가 에큐메니컬 순례의 첫 자리를 차지한 것도 순례단에게는 의미심장하게 다가왔다.
순례단은 스위스에 도착한 후 12월 10일 오전 제네바의 한 호텔에서 가진 합동기도회로 공식 일정에 들어갔다. 대림절 둘째주일을 맞아 미사에 함께하는 형식으로 진행된 기도회에서 20여명의 순례단은 한국 그리스도교의 화해와 일치를 위해 두 손을 모았다.
이날 미사를 주례한 김희중 주교는 “과연 우리 자신을 통하여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는 삶을 살고 있는지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묻고 계신다”면서 “함께하는 여정 속에서 교회일치를 향한 우리의 발걸음을 밝혀 주시도록 주님께 청하자”고 말했다.
여정에 함께한 대한성공회 서울교구장 박경조 주교는 “일치와 화해를 입으로 말하면서도 행동으로는 그러지 못하다. 이러한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이 갈라진 인류의 현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시고 몸소 보여 주신대로 분열과 폭력, 고통을 극복하고 서로 존중하며 일치의 길을 걸어가자”며 순례에 의미를 부여했다.
순례단의 다음 여정은 11일 교회일치 운동의 또 하나의 축을 이루고 있는 세계교회협의회(WCC) 본부 방문으로 이어졌다.
‘에큐메니컬 센터’
5억6000만 개신교 신자들을 대표하는 개신교계의 최대 기구인 WCC 본부 입구 간판에 씌어진 안내문은 신선하게 다가왔다. 에큐메니컬 센터가 별도로 있는 게 아니라 WCC 본부 자체가 개신교계 에큐메니컬 운동의 본령이라는 설명은 개신교계의 교회일치운동에 무지했던 순례단의 뇌리를 흔들어 놓기에 충분했다. WCC가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에큐메니컬 운동에 기원을 두고 있는 역사를 돌아보면 WCC가 개신교계의 에큐메니컬 운동을 이끌어 오고 있다는 것이 당연하게 다가왔다.
WCC 사무엘 코비아 총무는 한국 그리스도교 지도자들의 순례에 큰 감명을 받은 듯 상기된 모습으로 순례단을 맞았다. 이 자리에서 순례단은 한국 교회의 에큐메니컬 운동에 대해 소개하고 순례에 나선 배경을 설명했다.
이에 대해 코비아 총무는 “타종교와 조화를 이룬 모습이 인상적”이라며 “그 어느 때보다 종교간 대화가 중요시되고 있는 상황에서 한국 교회의 일치운동이 큰 결실을 맺길 바란다”고 전했다. 코비아 총무는 또 한반도의 평화문제에 깊은 관심을 표하며 “한반도에서 일어나고 있는 상황들을 모니터링하고 있으며 특히 6자회담에 주목하고 있다”고 밝혔다.
순례단은 코비아 총무에게 매년 일치기도주간(1월 18∼25일)에 교황청 그리스도인일치촉진평의회와 세계교회협의회(WCC) 신앙직제위원회가 공동으로 발간해오고 있는 일치기도 자료집 작성에 한국 교회가 중심적 역할을 하고 싶다는 의사를 전달해 긍정적인 답변을 얻었다.
순례단의 여정은 로마 교황청 방문으로 절정에 이르렀다. 한국 개신교 역사상 처음으로 교황청을 공식 방문한 순례단은 13일 오전 바오로 6세홀에서 마련된 일반 알현 시간에 맨 앞자리에서 교황 베네딕토 16세를 만났다. 교황은 한국 그리스도교 지도자들을 뜨겁게 환영하며 “한반도의 통일과 평화를 위해 항상 기도하고 있다”며 “사도 바오로와 같이 이 세상을 복음화하는 일에 힘써 달라”고 격려했다.
이어 순례단은 교황청 일치평의회 의장 발터 카스퍼 추기경을 만나 일치기도 자료집 작성에 한국 그리스도인들이 주도적인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요청했다. 이에 카스퍼 추기경은 “아시아지역에서 아직까지 기도문을 작성한 적이 없다”면서 “한국 교회가 정식으로 기도문 작성을 제안한 것은 매우 긍정적”이라고 화답했다. 이에 따라 순례단은 내년 6월까지 한국 교회의 일치운동 성과를 담은 제안서를 교황청과 WCC에 제출해 자료집 작성에 힘을 모아나갈 예정이다.
로마에 머무르는 동안 순례단은 꼰솔라따 선교 수도회 본부에서 지내며 수도원 체험을 하는 등 가톨릭교회에 대한 이해를 더하는 기회를 갖기도 했다.
순례는 17일 오후 터키 이스탄불에 위치한 그리스정교 총대주교청 방문으로 대미를 장식하게 됐다. 순례단은 이날 총대주교 바르톨로메오 1세를 알현하고 한반도 평화와 교회 일치를 위해 기도를 부탁했다. 총대주교는 “하나되게 하소서 하신 주님의 뜻을 받들어 그리스도인의 일치를 위해 계속 기도하자”고 말했다.
이번 순례를 주도한 채수일 교수(한신대)는 “개신교와 가톨릭교회가 여러 가지 이유로 분열의 길을 걸었지만 이번 순례를 통해 오랜 공동의 역사가 있다는 점을 다시 확인하는 계기가 됐다”며 “앞으로 신학생과 평신도들 가운데서도 이런 자리가 확대돼 서로 모르는데서 오는 오해를 극복하고 일치의 지평을 넓혀 나갈 수 있으면 좋겠다”고 밝혔다.
◆ 스위스 보세 에큐메니컬 신학대학원
교회 일치운동 가교역할 담당
종교개혁의 근원지였던 스위스에서 교회 일치운동의 새로운 모델을 발견하게 된 것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제네바 보세에 자리잡고 있는 보세 에큐메니컬 신학대학원(Bossey Ecumenical Institute·원장 이안 소카 신부.정교회)은 1952년 가을 전 세계의 에큐메니컬 지도자를 교육하고 양성하는 것을 목적으로 설립된 최초의 대학원이다.
1953년 첫 졸업생을 배출한 보세 대학원은 이후 매년 전 세계 곳곳에서 서로 다른 신앙 전통을 지닌 그리스도인 공동체와 교회로부터 찾아오는 성직자와 평신도들로 넘쳐난다. 이 대학원에서의 연구와 다양한 나눔을 통해 교회일치 운동의 새로운 전망을 확보한 이들만 지금껏 2500여명에 이른다.
가톨릭교회의 성직자와 평신도들은 물론 정교회 성공회 구가톨릭 교회(The Old Catholic Church) 등 다양한 역사와 전통을 지닌 그리스도인이 교육과정에 참여하고 있는 점도 눈길을 끄는 부분이다. 나아가 매 해마다 대학원에서 마련하는 정기 세미나 등에 참가해 일치운동의 새로운 비전과 지평을 대하고 돌아가는 이들과 그룹이 매년 수천 명에 이를 정도로 보세 대학원은 에큐메니컬 운동의 샘 역할을 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청년들을 위해 2주에서 6개월 과정의 다채로운 훈련 코스를 만들어 젊은이들이 일찌감치 일치운동에 젖어들게 하고 있는 점도 이채로웠다. 이를 바탕으로 보세 대학원은 지난 50여년 동안 냉전과 세상의 분열로 어려움에 처해 있는 이들 사이에서 이해와 평화, 화해의 징검다리를 놓는데 기여해왔다.
보세 대학원의 주요 역할 가운데 하나는 다양한 문화와 다양한 신앙 고백들간의 만남, 자체 프로그램을 통해 에큐메니컬적인 사고를 형성하는 것이다. 나아가 에큐메니컬 운동을 촉진할 수 있는 프로그램에 대한 연구를 비롯해 공동 예배, 공동체에서의 삶 등을 통해 교회일치로 향해 나아가는 지평을 넓히고 있다.
보세 대학원의 연구소는 오늘날 교회가 직면하고 있는 다양한 도전에 대한 학문적 근거를 제공하는 한편 인류와 세상이 함께 풀어가야 할 문제들을 분석하고 그리스도인들의 공동 대응 방안을 내놓음으로써 교회일치를 위한 노력을 인류 보편의 가치로 승화시켜 내고 있다.
보세 대학원을 이끌고 있는 이안 소카 신부는 “에큐메니컬 운동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강화하고 하느님 보시기 아름다운 모습으로 세상을 가꿔나가기 위한 소명”이라고 강조하고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이 함께 새로운 전망을 찾고 경험을 나눌 수 있다면 일치운동이 더욱 풍요로워질 것”이라고 밝혔다.
사진설명
▶주교회의 교회일치와 종교간대화위원회 위원장 김희중 주교(가운데)가 교황 베네딕토 16세를 알현한 자리에서 대한성공회 서울교구장 박경조 주교를 소개하고 있다.
▶12월 17일 오후 터키 이스탄불에 위치한 그리스정교 총대주교청을 방문한 순례단은 이날 총대주교 바르톨로메오 1세를 만났다.
▶제네바 보세 신학대학원에서 학교에 대해 설명을 듣고 있다.
▶세계교회협의회 본부에서 기념촬영을 했다.
▶스위스 제네바 보세에 위치한 에큐메니컬 신학대학원 전경.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