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 안에서 한국을 배워 갑니다”
“집 떠나 아프면 제일 서러워” 주머니 털어 봉사
2002년부터 1만 명 넘는 이주노동자 무료 진료
“주일학교 교사로 활동하며 나누는 기쁨 느껴요”
# 베풂이 아닌 나눔
“어떻게 이렇게 되도록 놔뒀어요? 아프지 않았어요?”
아픈 부위를 살펴보던 외과전문의 이종호(바오로·45·서울 잠원동본당)씨의 말에 미안함으로 한 번 붉어진 아짐(가명·31)씨의 얼굴이 한동안 제자리를 찾지 못한다.
“그게, 할 일이 많아서…, 나올 수가 없어서….”
의사와 환자 사이의 진료상담이 이어지는 동안에도 베니어합판으로 벽을 가른 옆방에서는 연신 ‘지이잉, 지이잉…’하는 기계음이 끊이지 않는다. 두 평도 채 안 되는 조그만 방에서는 두 대의 치과 유니트 체어를 오가는 치과전문의 허기회(펠릭스·40·구리 인창동본당) 원장의 몸놀림이 분주하다.
“아, 아…아.” “조금만 참으세요. 썩은 이가 부러졌군요.”
이날 처음 치과진료실을 찾은 필리핀인 에드윈(가명·36)씨를 배웅하는 허원장의 얼굴에 안타까움이 드리운다.
“큰 도움이 못 돼 아쉬울 때가 적지 않아요. 재료와 장비만 구비되면 제대로 된 도움을 줄 수 있을 텐데….”
잠시 얘기를 나누며 숨을 돌리는 사이 또 다른 이주노동자가 두 손으로 볼을 싸매고 들어온다.
경기도 남양주시 외곽에 위치한 의정부교구 천마성당 별관 2층에서 매 주일마다 문을 여는 ‘루카 클리닉’에서는 의사와 환자들 사이에 벌어지는 애틋한 실랑이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밖은 이미 쌀쌀한 늦가을인데도 진료실 안은 바쁘게 움직이는 의료진과 수시로 몰려드는 환자들이 뒤섞여 후끈거린다. 30여 석 남짓한 대기석은 빌 틈이 거의 없다. 클리닉을 찾는 이들 대부분은 성당 인근 가구공단 등에서 일하는 이주노동자들. 매번 진료할 때마다 평균 60여 명, 많게는 100명이 넘는 환자가 찾기도 한다.
진료 분야도 내과와 일반외과, 치과를 주축으로 정형외과, 이비인후과, 피부과, 안과, 산부인과, 소아과, 가정의학과, 재활의학과는 물론 한의학과까지 대부분의 의료서비스를 망라하고 있어 조그만 종합병원이라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다.
루카 클리닉이 문을 연 건 지난 2002년, 서울대교구 오금동본당 신자들로 구성된 전문 의료봉사 모임 ‘루카회’(회장 이종건)가 발족되면서였다.
매달 짝수 주일마다 진료팀을 꾸려 클리닉을 찾기 시작한 이래 5년 넘게 꾸준히 의료봉사를 펼쳐오고 있다.
이들의 활동이 알려지면서 2005년 11월부터는 서울대교구 잠원동본당 가정의료부 내 신자들이 주축이 된 의료팀이 매달 홀수 주일의 의료봉사를 자청하고 나섰다.
매주 진료 때마다 전문의를 비롯해 약사, 간호사, 한의사에 통역봉사자까지 분야별 전문가 20여 명이 팀을 이뤄 각자가 가진 탈렌트를 유감없이 발휘한다. 기본적인 치료와 간단한 수술은 현장에서 해결하고 큰 수술이 필요한 경우는 협력병원들과 연결해 갖가지 도움을 주고 있다.
봉사에 나선 이들 대부분이 자신의 소중한 시간은 물론 주머니까지 털어가며 임하고 있어 클리닉은 늘 훈훈함이 느껴진다. 그런 가운데서도 늘 자신들의 부족함을 먼저 돌아보는 게 봉사자들의 면면이다.
활동 초창기부터 진료보조 업무를 맡아오고 있는 윤춘선(리디아·53)씨는 “도움의 손길이 가야하는 이들이 더 많은데 줄 수 없어 안타까울 때가 많다”면서도 “우리가 나누는 조그만 사랑을 보고 클리닉을 찾는 이들 가운데서 생활의 활력소를 얻어가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이런 클리닉의 진가가 알려졌기 때문일까, 그동안 이곳을 거쳐 간 환자만도 1만 명을 훌쩍 넘는다.
지난 2005년부터 의료봉사팀을 이끌고 있는 안재홍(크리스토폴·61) 회장은 “타향에서 가장 고향 생각이 날 때가 아플 때가 아니겠느냐”면서 “이주민들이 우리의 조그만 사랑으로 잠시나마 주님이 주시는 평화를 얻게 해줄 수 있어 보람을 느낀다”고 말했다.
# 우리도 어엿한 한국인
“어허, 고만.” “이거 맞추는 사람, 선물.”
그만그만한 크기의 스무 명 남짓한 아이들이 한 방에 모인 의정부교구 진접본당 초등부 주일학교는 흡사 전쟁터같다.
잠시도 다물지 못할 것 같은 입을 놀려대는 아이들 사이를 이리저리 오가며 주일학교를 진행하는 교사는 피부색이 좀 다를 뿐 아이들에게는 여느 교사나 다를 바 없이 여겨지는 듯했다.
1, 2학년의 저학년 주일학교 교사로 맹활약하고 있는 이들은 다름 아닌 38살 동갑네기 필리핀 교사 자밀로우 나쇼날씨와 안젤리나 발라자씨.
지난 2000년 지금의 남편과 결혼해 한국에 온 자밀로우씨와 한해 뒤 한국에 왔다 남편을 만나 결혼한 안젤리나씨는 본당 유치부 주일학교에 아이들을 내보내고 있는 어엿한 한국인이다.
이날의 미션은 성찬례 예식문의 의미 알아보기.
“죄를 사하여 주려고 너희와 모든 이를 위하여 흘릴 피다.”
‘죄를 사한다’는 말을 어떻게 아이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해줄까. 두 사람이 주춤주춤하는 사이 주일학교 교무 박은영(아가다·40)씨가 거들고 나선다.
머쓱해있는 동안 드디어 두 사람이 진가를 발휘할 시간이 돌아왔다. 주일학교 말미에 7개 나라말로 성호경을 알아보는 시간이 들어 있었던 것. 오늘은 영어 성호경 외우기가 마지막 과정이다.
“자, 선생님이 먼저 한번 해볼게요. In the name of the Father, of the Son, of the Holy Spirit, Amen. 잘 봤죠.”
“자, ‘Holy Spirit’이 뭘까요? 맞추는 사람 선물.” 아이들을 구슬리는 법도 이미 터득한 모양이다.
안젤리나씨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저요, 저요.” “선생님, 제가 먼저 손 들었어요” 하는 소리가 빗발친다.
한 시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른다.
“우리 다음 주엔 12시까지 오는 거예요.” “예!”
말 마치기가 무섭게 후다닥 교리실을 나서는 아이들의 모습에 무슨 큰일을 치러낸 듯한 안도감이 두 사람의 얼굴을 훑고 지나간다.
올 초부터 주일학교 교사로 활동하고 있는 두 사람이 한국에 정착하기까지는 어려움이 적지 않았을 법했지만 내색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 한국 생활 7년째인 안젤리나씨가 처음 한국에 왔을 때 성당을 못 찾아 십자가만 보면 찾아들어갔던 경험을 털어놓으며 웃음을 지었다.
“성호를 긋는데 이상하다는 눈빛으로 쳐다보는 사람이 많아서 아, 아니구나 싶었죠.”
지난해 우연한 기회에 처음 진접성당을 찾은 자밀로우씨는 주변에서 쓸 수 있는 물건들이 버려지는 게 안타까워 본당에 건의해 재활용품 10여 상자를 모아 고향인 필리핀에 부치기도 하는 등 대한민국 억척 엄마의 모습을 배워가는 중이다.
“도움을 받기만 하는 게 아니라 나눌 수 있어 좋아요.”
◎의정부교구 이주사목 현황은
경제적 지원 넘어 ‘영성 프로그램’도 제공
40만 명이 넘는 것으로 추산되는 국내 이주노동자 가운데 5분의 1인 8만여 명이 경기 북부지역에 거주하고 있어 이주사목은 의정부교구에서도 적잖은 비중을 차지하는 사목 영역으로 자리잡아가고 있다.
이를 반영하기라도 하듯 의정부교구는 전국 16개 교구 가운데 가장 많은 3명의 이주사목 전담 사제를 두고 있다.
의정부이주노동자상담소의 경우만 보더라도 한해 평균 800건이 넘는 상담이 이뤄질 정도로 이주노동자들이 즐겨찾는 곳으로 뿌리내리며 이주사목 센터로서의 몫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이들 거점 역할을 하는 기관들은 이주민들이 지역사회에 자리잡을 수 있도록 물질적 경제적 지원을 하는데서 몇 걸음 더 나아가 정신적 유대감과 영성적 도움을 얻을 수 있도록 다채로운 프로그램을 제공해오고 있다.
한 예로 이주민 밀집지역에서 루카 클리닉, 성모 클리닉 등 무료 의료봉사단체들의 활동을 통해 이국땅에서 육체적 아픔을 겪고 있는 이들을 보살피는가 하면 필리핀 등에서 온 이주민들을 위한 미사를 개설하는 등 다양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이러한 노력에 힘입어 의정부교구에만 영어 스페인어 타갈로어 베트남어 등 외국어 미사를 봉헌할 수 있는 곳이 10곳이 넘을 정도다. 이 때문에 해당 언어를 사용하는 공동체가 점차 활성화되는 부수적인 효과도 거두고 있다.
이 외에도 각 상담소에서 이뤄지는 한글교육을 비롯해 컴퓨터 교육은 물론 이주여성들을 위한 사회적 통합교육, 이주노동자들을 위한 노동법 교육 등 이주민을 위한 다양한 교육의 장을 마련해 이주민들이 지역사회의 일원으로 함께 살아갈 수 있도록 돕고 있다.
조해인 신부(교구 이주노동사목 전담)는 “교회가 이주민들에게 영성적이고 좀 더 현실적인 도움을 줄 수 있는 네트워크를 갖춰야 필요성이 더해가고 있지만 아직은 미약한 실정”이라면서 “각 나라별 공동체와 언어권별 특성 등을 고려해 보다 적극적인 사목 방안을 마련해 다가설 때 효과적인 이주사목이 가능할 것”이라고 말했다.
사진설명
▶이주 노동자들이 루카 클리닉을 찾아 의료 봉사자들로부터 혈압 등 건강검진을 받고 있다.
▶안젤리나씨가 진접본당 주일학교 교리시간에 영어로 성호경 긋기를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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