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것’‘우리 것’ 먼저 알자
야훼를 신고 그분의 생명의 길을 가는 것, 이것이 신학이다. 이것은 사변 차원에 치중된, 소극적인 의미에서 ‘머리로 하는 신학’을 철저하게 극복한다. 야훼의 신을 신은 발이 가는 곳에 야훼의 이름을 기억하는 머리 있기 때문이다.
고 서남동 교수는 민중의 현실을 신학과 영성의 원천으로 삼을 끈기를 키워 가도록 다리가 되어 준 신학자이다. 그는 ‘민중신학의 아버지’라고 일컬어질 만큼, 70년대 중반에 민중신학의 근간을 세우는 데 기여하였다.
그런데 그가 민중신학에 눈뜨게 해준 인물이 김지하였다. 서교수는 1980년에 송기득과 가진 대담에서 다음과 같은 물음과 답을 주고받았다.
“민중을 신학의 주제로 삼게 된 동기는 무엇이었나요?” “내가 민중을 신학의 첫째 주제로 관심갖게 된 직접적 계기는 한 민중의 시인을 알게 된 데 있습니다. … 이러한 사실을 나는 지하의 문학과 그의 정치적 행동을 통해서 깨닫게 되었는데, 그만큼 그는 내게 호소력을 가지게 되었습니다.”(민중신학의 탐구, 한길사, 1983, 173~4)
서남동은 1970년대 초에 이미 ‘생태 윤리’에 대해서 이야기할 만큼, 세계 신학의 동향에 대한 탁월한 감지력과 소화력을 갖고 있었다. 그가 1974년 세계교회협의회가 개최한 한 국제 신학회의에 참석했을 때였다.
성서연구를 맡았던 한스 베버(Hans R. Weber)가 ‘여러 문화에서의 십자가’를 주제로 강연하는 자리에서 그는 처음으로 김지하의 작품을 신학적으로 해석한 시도를 접한다. 베버는 당시 “가톨릭 시인 지하의 ‘육혈포숭배’”를 소개하면서 자기의 십자가 해석을 종결지었다.
지면 관계상 총을 가진 자로 대변되는 권력층이 예수에게 어떻게 처신하고 그러다가 어떻게 자멸하는지를 그린 이 시를 소개하지 못한다. 관심 있는 이들은 ‘오적’(솔, 1993)에서 전문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베버는 발표 후 한국에서 온 서남동 교수에게 김지하에 대해서 물었다. 하지만 그는 답을 할 수 없었다. 자기 나라 시인의 작품이 외국 신학자에 의하여 해석되어 당대 세계의 신학적 투신을 이끌 원천으로 쓰이고 있었다.
서교수는 세계 신학의 흐름을 가장 잘 알고 있다는 평가와 함께 한국 신학계의 안테나와 같은 존재로 인정받았던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는 베버가 말하는 한국의 민중 시인 김지하를, 신학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차치하고, 제대로 알지조차 못했던 것이다.
왜 이런 사태가 발생하였는가? 당시 서남동 교수가 한국인으로서 ‘한국’에서 신학을 하면서도, ‘서구’의 신학을 소개하고 전달하며 논해도 논했지, ‘한국’의 신학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한국인의 몸과 영을 통합시킨 ‘한국’의 신학이 아니라, 몸은 한국에 있으면서도 신학의 정신은 서구에 머무는 소위 종속 내지 기껏해야 아류 단계에, 혹은 분열 상태에 머무는 신학 수준을 극복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자기의 몸을 돌볼 줄 모를 때, 자기의 역사 현장에서 신음하는 민중이 저 온몸으로 부르짖는 소리에 귀기울일 줄 모를 때, 그때 신학의 영은 일그러지고 왜곡되며 분열될 수밖에 없다.
세계 신학계에서 이미 한국의 신학자로 일컬어지기 시작한 김지하를 정작 한국의 신학자는 알지 못하는 사태가 발생한 것은 우리의 신학계가 그만큼 자기의 몸을 돌볼 줄 모르는 형태로 신학을 하는 데 길들여져 있었음을 드러내는 한 상징적 사건이었다.
서남동은 이 회의가 끝나고 돌아오는 길에 일본에 들러서, 당시 일본어로 번역되어 있던 김지하의 작품들을 모아들인다. 그리하여 돌아오자마자 곧바로 김지하 연구에 몰입한다.
그렇게 하여 1975년 2월에 ‘기독교사상’에 발표한 그야말로 민중신학의 신호탄과도 같은 작품이 ‘예수, 교회사, 한국교회’였다. 그리고는 다시 같은 해 4월에 역시 ‘기독교사상’에 마침내 ‘민중의 신학에 대하여’라는 글을 발표하면서, ‘민중 신학’이라는 개념을 언어화하기에 이른다.
그는 1984년에 귀천하기까지 민중신학이 ‘한국’의 신학으로 굳건하게 설 수 있도록 헌신하였다.
서남동은 그랬다. 그러면 한국 가톨릭 신학계는 어떤가? 우리는 과연 우리 몸의 현실을, 이땅의 민중의 소리들을 우리의 신학혼에서 소외되지 않은 형태로 건강하게 돌볼 줄 아는 신학을 갖고 있는가? 있다면 그것이 무엇이고, 없다면 그 이유가 무엇인가?
황종렬(미래사목연구소 복음화연구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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