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락, 절망 극복한 ‘변화 주역’
매주 한차례씩…마을, 본당 대소사도 나눠
대신학교 과목에 포함 인도교회 관심 입증
“빈부격차, 신분제도 극복할 수 있는 열쇠”
전기가 다시 나갔다. 오늘 하루만 세 번째다.
아홉 살 안셀도 성경읽기를 멈췄다.
‘유닛 리더(Unit Leader, 우리나라의 구역장 개념)’ 스테판 쿨라스씨가 부엌에서 휴대용 전등을 가져와 불을 밝혔다. 모임에 참석한 50여명의 얼굴이 희미하게 비친다.
안셀이 다시 성경을 읽기 시작했다. 비 오는 우중충한 저녁시간. 전기마저 나가 더욱 을씨년스럽지만 성경을 읽는 목소리만큼은 힘차고 진지하다.
인도 트리반드룸대교구 콜렘코데본당 ‘48유닛’(Unit, 인도의 소공동체 단위, 이하 구역)의 소공동체 모임이 한창이다. 갓 네 살 먹은 어린아이부터 눈이 보이지 않는 여든 할아버지까지 구역 스물 다섯 가정이 한 자리에 모였다.
이끄는 사람은 없어도 시작기도, 성경읽기와 복음묵상, 생활나눔, 마침성가로 진행되는 모임이 물 흐르듯 이어진다. 한 주에 한번 열리는 소공동체 모임은 가족뿐 아니라 마을, 본당의 대소사까지 솔직하게 나누는 시간이다.
생활 나눔에 앞서 스테판 쿨라스씨가 한 주간 구역의 어려운 이웃을 도운 이야기를 꺼낸다. 구역 모든 가정이 정성을 모아 한 가정에 힘을 줬다는 쿨라스씨의 보고에 모두들 흐뭇한 표정이다.
불과 5년 전. 대부분이 어부인 콜렘코데 마을 주민들의 삶은 고통 자체였다. 당시 마을 주민들의 하루 수입은 150루피(한화 약 3000원). 이것도 어획량이 많은 일 년 중 한 두 달 이야기였다. 빈 그물만 건지는 날이 더 많았다.
벌이가 신통치 않다보니 어부들은 술을 가까이하게 됐고 불법적으로 집에서 술을 만들어 팔기까지 했다. 알코올 중독으로 목숨을 잃는 사람도 생겨났고 가정이 깨지는 경우도 많았다. 가난은 마을 전체를 망가뜨렸다.
그런 마을에 변화가 찾아왔다. 소공동체가 도입된 것이다. 트리반드룸대교구의 소공동체 사목팀이 본당을 찾아 교육하고 활동가(Animater)를 양성했다.
마을별로 주민들을 모아 50개 구역(한 구역 25가정)을 꾸렸다. 일주일에 한 번씩 모든 가정이 모여 말씀을 읽고 나누는 시간을 가졌다. 부모가 없거나 장애로 어려움을 겪는 가정을 돕는데 소공동체 모임이 주도적으로 나섰다.
하나의 가정이 또 다른 커다란 가정으로 거듭났고 가진 것은 없어도 나누려는 분위기가 소공동체를 통해 살아났다. 무엇보다도 말씀을 통해 하나가 됐다는 데서 본당 신자들은 의미를 찾는다.
인도교회가 소공동체 활성화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지난해 11월 인도에서 열린 아시파 총회에도 전국에서 140여명의 성직, 수도자와 평신도가 참석했다. 아시아 각국 참가자가 130여명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엄청난 숫자다.
인도교회가 소공동체에 관심을 갖는 데는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는 너무나 넓은 사목관할지역에 비해 사제 수는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특히 농어촌지역의 경우 본당 한 곳이 관할하는 지역이 넓어 신부 한명으로는 사목이 불가능한 형편이다. 교회는 공소개념으로 소공동체 모임을 만들고 활동가를 양성하고 있다. 유닛리더 또는 애니메이터로 불리는 활동가들은 공소회장 역할을 한다. 각 본당에는 활동가들의 공동체인 소공동체위원회가 꾸려져 있다. 눈에 띄는 특징은 소공동체위원회나 활동가 등이 모두 평신도가 중심이 돼 움직인다는 점이다. 평신도의 자발적 의지와 참여로 이뤄지는 소공동체 모임은 그만큼 역동적이다.
두 번째 이유는 뿌리깊게 자리한 신분차별과 빈부격차를 타파하고자 하는 데 있다. 카스트제도를 통해 인도 사람들은 태어날 때부터 계층이 나뉘어 있다. 교회 또한 신분차별제도로 인해 어려움을 겪고 있기는 마찬가지. 교회는 모든 신자들이 하느님의 자녀라는 동등한 위치에서 함께 말씀을 나누는 소공동체가 신분제도를 극복할 수 있는 열쇠로 보고 있다. 빈부격차로 인해 생기는 위화감도 소공동체를 통해 반감시킬 수 있다는 것이 교회의 생각이다.
인도교회 소공동체의 특징은 남녀노소 불문하고 모든 가족이 함께한다는 것이다. 콜렘코데본당의 경우도 토요일 또는 주일미사 후 모임이 열리며 이때는 가장을 비롯해 모든 가족이 참석한다. 한 구역이 스물 다섯 가정으로 이뤄진 것을 감안하면 평균 50~100여명이 모임에 나오는 셈이다.
각 교구마다 성직자와 수도자, 평신도 전문가들로 구성된 ‘소공동체 사목팀’이 운영되는 것도 눈에 띈다. 사목팀은 교구 내 각 본당을 순회하며 신자들을 대상으로 교육하고 활동가를 양성한다. 본당과 신자들의 특성과 지역 상황을 감안해 소공동체 정착을 위한 길잡이 역할을 하는 사목팀은 특히 성직자와 수도자, 평신도가 각자의 위치에서 바라보는 소공동체의 발전방향을 본당에 알리는 데 주력한다.
‘소공동체’가 신학대학 교육과정에 포함돼있다는 점은 인도교회의 관심이 그만큼 크다는 것을 보여준다. 소공동체 정착에 열쇠를 쥐고 있는 성직자가 신학생 시절부터 소공동체에 대해 관심을 갖고 교육을 받는 것은 소공동체 활성화의 탄탄한 토대다.
교구별 또는 전국적으로 소공동체에 관심을 갖고 있는 사제들의 모임이 구성돼 있는 것도 소공동체 발전에 큰 도움을 주고 있다. 아울러 매년 한번씩 12주간의 소공동체 심화교육과정도 열린다. 교육에는 인도 뿐 아니라 독일 등 유럽교회와 아시아교회 소공동체 관계자들도 참석하는 등 큰 관심을 끌고 있다.
“인도 사람들은 공동체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종교의 나라답게 사람들의 가슴속에는 자연적으로 하느님을 경외하는 종교심이 스며있습니다. 소공동체가 정착하기에 정말 좋은 심성을 갖고 있는 것이죠.”
코히마(KOHIMA) 교구장 호세 무칼라 주교는 “인도 신자들은 일상생활 속에서 기도하고 이야기를 나누는 데 인색하지 않다”며 빠른 시일 내에 소공동체가 곧 신자들의 삶 자체로 정착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인터뷰] 인도 주교회의 소공동체사목협의회장 토마스 다브레 주교
“공동체적 전통이 소공동체 큰 기반”
“우리는 소공동체를 통해 교회의 본질적인 사명을 구현할 수 있다고 봅니다. 소공동체사목협의회는 각 교구가 소공동체를 통해 참 교회의 모습을 만들어갈 수 있도록 힘을 실어주고 있습니다.”
주교회의 소공동체사목협의회 토마스 다브레 주교는 “현재 100개 이상의 교구가 소공동체를 도입했고 50% 이상의 본당에서 소공동체 모임이 이뤄지고 있다”며 “소공동체사목협의회는 2년에 한 번씩 전국모임을 열어 각 교구의 경험을 나누고 발전방안을 모색하고 있다”고 밝혔다.
어려움도 많다. “하느님과 나 자신만 알뿐 이웃과의 연대 또는 소공동체의 필요성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없는 게 아쉽다”는 다브레 주교는 “신자들 뿐 아니라 성직자들의 관심도 미흡한 형편”이라고 말했다.
다브레 주교는 하지만 인도교회 소공동체에 대해서는 낙관적인 전망을 내놓았다.
“인도에서는 마을 주민 중 한명이 세상을 떠나면 천 여 명이 넘는 사람들이 찾아와 슬픔을 나눕니다. 자존심도 세지만 그에 못지않게 서로를 이해해주고 생각해주는 마음도 크죠. 이러한 공동체성이 소공동체의 큰 기반입니다.”
다브레 주교는 “소공동체는 말씀 안에서 말씀을 본받아 서로에게 관심을 보여주고 관심을 받는 것에서 시작한다”며 “인간이 본질적으로 사회적 존재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인도교회 소공동체는 공동체성이라는 토양 아래서 큰 열매를 맺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사진설명
▶인도교회 소공동체의 특징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모든 가족이 모임에 참석한다는 것이다. 성경을 바라보며 자유기도를 바치는 모습.
▶소공동체 모임에 참석하기 위해 모인 인도 신자들. 옷까지 갖춰 입은 여성들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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