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중을 바로 서게 하는 ‘발판’
서남동이 김지하에게 민중의 신학의 단초를 제공받은 것은 김지하가 자기를 건 신학의 수행자였기 때문이다.
한국 가톨릭 신학계에서는 이 사실을 신학적으로 진술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 신학을 사변적으로 접근하고 서구 중심으로 논하며 성직자 중심의 신학 사고에 길들여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학을 “야훼를 신고 그분의 생명의 길을 가는 것”이라고 한다면, 지학순 주교나 김지하 같은 인물이야말로 신학의 수행자이다.
야훼를 신고 그분의 생명의 길을 간다는 것은 단순히 말로 하는 신학이나 책상 위에서 글로 하는 신학과는 다를 수밖에 없다. 여기에는 자신의 존재가 걸려 있기 때문이다. 먼저 지주교의 경우를 보자면, 그는 바오로 6세에게 이렇게 편지를 쓴 적이 있다.
교황님!
이곳은 호젓한 감방입니다. 그러나 저는 고독하거나 외롭지 않습니다. 조작된 죄목으로 갇혀 있고 외부와의 접촉이 단절된 이곳이지만 저는 하느님과 일치하여 있습니다. …
제가 구속된 이유, 즉 죄목이란 내란 선동과 긴급조치 위반입니다. 그러나 내란 선동이라는 것은 사실무근의 것임을 밝혀 드립니다.
저는 다만 억압받고 짓눌려 있고 민주국가에서 보장받아야 할 인간의 기본권마저 빼앗기고도 말 못하는 국민의 권리를 되찾아야 하겠다는 신념에서 이웃을 도왔습니다.
인권의 침해는 곧 하느님에 대한 모독이기에 신앙 안에서 인권의 침해로 상처받고 신음하고 죽어 가는 벗을 위하여 오늘 이 땅에 또 다른 착한 사마리아 사람이 필요하였습니다. …
교황님, 저는 한 인간으로서, 그리스도교 신앙인으로서, 교회의 주교로서, 하느님과 교회와 국가를 사랑하는 하느님의 충실한 종입니다.
저는 인간의 뜻을 따르기보다는 하느님의 뜻을 따라야 했습니다. 억울하게 갇혀 있는 많은 정의의 투사들, 목사, 교수, 학생, 변호사, 언론인들과 함께 이곳에 있으면서 저는 가장 미소한 형제들의 벗이 되고 싶었습니다.
저는 기도 중에 이 글을 쓰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면 누가 우리를 대항하리요” 하는 사도 바오로의 말씀을 다시 묵상해 봅니다.
끝으로 교황님의 영육간에 건강을 기원하며 저와 원주교구 모든 교우들에게 교황님의 강복을 청합니다.
1974년 9월 서울 구치소에서
지학순 주교 올림
일본 식민지배 시기에도 어떤 주교도 당하지 않았던 고난을 지주교는 유신체제에서 온몸으로 겪었다.
야훼를 만나 그분을 배우고 그분을 배워서 그분을 신으로 삼는다는 것이 이런 것이다. 야훼가 밟혀서 모세가 서게 하였던 것처럼, 지주교는 민중이 딛고 서도록 그렇게 밟혔던 것이다.
이처럼 바닥에 설 줄 알았던 주교가 민중과 민족을 위해서 사목을 하는 방식이 실로 야훼의 종답다. 1972년 8월에 남한강 일대에 대홍수가 발생하여 원주 교구 지역이 크게 피해를 입게 되었다.
지주교는 이 지역의 사회 경제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하여 ‘원주교구 사회개발위원회’를 조직하였다. 그리고는 지역사회 개발활동을 뒷받침하는 데 필요한 원조를 서구 교회에 요청하면서 “거지 주교” 역할을 수행하였다.
한번은 그가 독일 미제레올을 찾아갔을 때 담당관이 사업 기획 의도며 절차 등을 구체적으로 제시할 것을 요구하자 지주교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불쌍한 사람들을 위해 쓰겠다는데 무슨 말이 많아요? 미제레올 돈은 독일 교회 돈이 아니라 좋은 일에 쓰라고 하느님이 맡겨 놓은 것이니까 내놓으란 말이에요.”(‘그이는 나무를 심었다’, 공동선, 2000, 125~6)
지주교는 즉각 지원을 얻는 데 성공하였다. 야훼의 종으로서 야훼의 뜻을 알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저 야훼의 종은 야훼의 돈을 가져다가 야훼의 민중이 생명의 길을 가는 데 쓰게 할 영성적 뱃심을 갖추었고, 하느님의 돈을 관리하던 저 청지기들은 하느님의 사람에게 그 돈을 내줄 줄 알았다.
실로 프란치스코 성인이 말했듯이, 하느님의 일을 하게 하는 것은 돈이 아니라 민중의 친구로서 그들과 함께 밟힐 줄 아는 가난한 영인 것이다.
황종렬(미래사목연구소 복음화연구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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