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 숨고르고 생명의 신비 느껴봐요”
자연의 아름다움은 아무리 칭찬해도 넘치지 않는다. 외딴 길가에 핀 이름모를 들꽃에서부터 이름만 대면 알수 있는 유명한 산자락 웅장한 바위까지. 온통 사람 손길과 기계질로 덧씌워진 현대문명 안에서 자연의 아름다움은 더욱 빛난다. 당연하다. 기획, 연출, 제작 모두 하느님이시니. 여느 평론가의 비평 한줄도 필요하지 않다.
요즘 사람들은 바쁘다는 말을 연신 내뱉는다. 출발지와 목적지만 뚜렷해 가는 도중 볼 수 있는 주변의 아름다움을 놓치고 산다. 잠시 걸음을 멈추고 시선을 내려보자.
땅콩꽃, 파꽃, 참깨꽃, 감자꽃…. 아하, 열매가 열리려면 꽃도 있었겠지. 빨갛고 노랗고 파아란 이름모를 열매는 또 왜 이리 많은가? 오솔길, 논두렁길, 흙길, 눈길, 돌길, 아스팔트길…. 길도 많다. 산능성이도 시시각각 다양한 장면을 선보인다. 물과 흙이 만나는 물가 모습도 이색적이다.
춘천교구에서는 이러한 자연의 아름다움을 담은 사진으로 교구 달력을 제작, 배포해 큰 호응을 얻고 있다.
1년 내내 집안의 가장 중심 혹은 가장 눈에 잘 띄는 벽면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바로 달력. 사실 달력은 마음만 먹으면 공짜로도 손쉽게 얻을 수 있는 세상이다. 각 서점마다 유명작가의 작품을 담은 기획달력들도 즐비하다.
그러나 춘천교구의 달력에는 또다른 매력이 있다. 바로 인공미가 아닌 편안하면서도 깊이있는 자연의 내음이다.
교구는 지난 1998년부터 달력을 만들기 시작했다. IMF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이들에게 위로의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기획했다. 신자들은 성당 달력인데 왜 성화가 없느냐는 불평도 간간이 한다. 광고를 싣지 않아 제작비가 부담된다는 본당의 불만도 있다. 그래도 이 달력은 꾸준히 인기를 얻으며, 이젠 교구밖에서도 찾는 이가 꽤나 늘었다.
교구달력의 매력은 사진에만 그치지 않는다. 하루, 한달, 일년의 일상을 하느님 곁으로 안내하는 사목교서 내용을 발췌해 담았다. 시편 구절도 만날 수 있다. 사진 내용과 절묘하게 맞아떨어지는 말씀이다.
달력에 담는 말씀과 소재는 해당년도의 2여년 전부터 교구장 장익 주교가 직접 기획한다. 사진작가 신명우씨는 정해진 성경구절이 느껴지는 자연을 찾아 사계절 내내 촬영을 다닌다.
장익 주교는 “요즘 사람들은 웰빙이다 뭐다 하며 건강에 큰 관심을 갖지만 정작 정신적, 영적 건강에는 소홀한 편”이라며 “잠시 숨을 고르고 영혼을 정화하는 시간을 가져보자”고 말한다. 싹이 트고 꽃이 피고 열매가 맺는 생명의 신비를 가만히 느껴보자는 것이 장익 주교의 권유다. 요즘 세상에는 그냥 둔 것이 없다고. 하다못해 자연식품이라는 것들도 온갖 손길을 더해 ‘기능성’이니 ‘웰빙’이니 수식어를 붙인다고.
“‘사진寫眞’은 ‘있는 그대로의 참’을 ‘베끼는’ 것입니다. 요즘 사람들은 재간을 부리지 않으면 바보스럽다고 말하지요. 하지만 지금까지 번드르르한 말이 부족해 세상일이 잘못 돌아가거나 사람들이 잘못된 삶을 산 적은 없는 듯 합니다. 이제 말은 그만 좀 자제하고 하느님께서 주신 자연의 선물을 만끽하는 시간도 가졌으면 합니다.”
“사진 촬영은 창세기 말씀을 묵상하는 과정”
◎사진작가 신명우씨
“제게 사진 촬영은 ‘보시니 참 좋았다’라는 창세기의 말씀을 묵상하는 과정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 만드신 자연의 원래 모습, 더 좋은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10여년째 달력 제작을 위한 사진 촬영에 빠져있는 작가 신명우(요셉)씨는 “현대사회에서는 환경사진 조차도 상업화된 것이 현실”이라고 지적한다. 한 풍경사진가가 좀더 멋진 구도를 잡는다는 명목으로, 멀쩡한 생가지를 베어 다른 가지 위에 걸쳐두는 것을 보고 어이없어했던 경험도 큰 충격이었다.
그는 사진 촬영에서 별다른 테크닉을 넣지 않는다. 자연 스스로가 만들어내는 형상과 색상을 고스란히 담는데 더욱 집중한다.
촬영 장소는 가정집 뒤 텃밭에서부터 설악산 꼭대기까지 다양하다. 단순히 풍경이 아니라 성경구절을 묵상하며 찾는 장면이라 몇배 힘겨운 것도 사실이다. 작업 특성상 순간 포착을 위해 아무리 더운 날도, 아무리 추운 날도 수십시간을 기다리는 건 예삿일이다. 수년 전부터는 암과의 힘겨운 싸움을 이어가고 있지만, 자연 안에서 만큼은 자유롭다. 지금은 항암치료도 중단하고 자연과 카메라와 벗하며 지낸다.
신씨는 원래 전문작가는 아니었다. 이러한 그의 다채로운 경력은 더욱 색다른 느낌으로 사진을 찍어내게 한다. 그는 디자인과 한국미술사를 전공했고, 달력 디자인으로 제8회 가톨릭미술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한국교회의 상징처럼 널리 활용되고 있는 성체대회 로고도 그의 작품이다.
다른 사진작가들은 그의 작품을 보고 단순하다고도 하고, 그림같다고도 말한다. 한국 사진사의 선구자로 꼽히는 김규진씨나 지운영씨도 본업은 화가였다는 것이 상기된다.
신씨 자신은 작품을 ‘창작’하는 것이 아니라 ‘창조’를 배우고 있다고 강조한다. “출사할 때마다 꼭 사도신경을 외우게 됩니다. ‘천지의 창조주를 저는 믿나이다’라는 신앙고백이 왜 첫머리에 있는지 가슴 깊이 깨닫고 있지요.”
신씨는 앞으로도 ‘창조의 증언자’로서 카메라에서 시선을 떼지 않겠다고 한다. 달력에 싣지 못한 수천점의 사진을 추려 전시회를 열고 싶은 작은 바람도 있다.
사진설명
사진작가 신명우씨(왼쪽)와 춘천교구장 장익 주교가 생태 사진 달력을 보며 얘기를 나누고 있다. 나머지 사진들은 달력에 실렸던 신씨의 작품들.
기사입력일 : 2007-0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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