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옥도 뚫는 ‘생명의 힘’
김지하는 장일순이 다리를 놓아 1971년 부활절에 프란치스코라는 세례명으로 입교하였다. 그가 ‘오적’을 쓴 다음해였고, 가톨릭계 잡지 <창조>에 ‘비어’를 발표하기 1년 전이었다.
그가 세례를 받던 해 10월에 박정희 정권의 권력을 등에 업고 자행하던 부정과 부패에 맞서 한국 가톨릭 역사에서 최초로 원주교구가 시위를 한 적이 있다. 김지하는 이때 교구 기획위원으로 일하면서 선언문의 초안을 작성하였다.
이런 일련의 활동은 김지하가 야훼를 신고 민중과 함께 살아가는 한 방식이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이른바 민청학련 사건의 배후로 지목되어 1974년 4월에 옥에 갇혔다.
지학순 주교가 옥살이를 하게 된 이유 가운데 하나가 이때 김지하에게 자금을 대주었다는 것이었다. 김지하는 다음해 2월 15일에 형집행정지로 출옥했다가 한 달도 채 되지 않은 3월 13일에 다시 붙들려서, 박정희가 살해당한 다음해인 1980년 12월에 가서야 석방되었다.
박정희 정부가 김지하를 가두려 한 이유는 무엇인가? 당대 정권은 자신들의 삶의 자리에서 정당한 생존 방식을 질문하는 민중에게서 그를 떼어놓으려 했다.
그동안 억눌려 있던 민중의 심혼이 그의 혼의 소리에 닿아서 마치 봄비 만난 싹이 움트듯 기지개를 켜고 일어나 민족과 민중의 생명의 질을 함께 질문하는 저항의 영으로 떨쳐일어서는 것을 막으려 했던 것이다.
그런데 민중과의 물리적 임장이 깨어진 거기에서 새로운 임장이 솟아오르기 시작하였다. 이 새로운 탄생을 가능하게 한 것은 온생명의 “생태적 임장(ecological presence)”이다. 김지하는 생명의 임장에 대한 새로운 체험을 이렇게 술회하였다.
“서대문 감옥은 일제 때 지은 낡은 집이라 쇠창살이 요즈음 교도소하고 틀려요. 봄이면 쇠창살 사이로 하얀 민들레 씨가 막 날아 들어온다고.
어느날 민들레 씨가 들어와 천장에 가득 차서 아침에 빛이 들어오면 빛 속에서 하늘하늘 춤을 춘다고. 그날따라 그것이 그렇게 아름다운거야. …
또 평소에도 보아왔지만 그냥 지나쳤는데, 시멘트 받침하고 쇠창살 사이에 비 때문에 조그만 홈이 파였는데 그 홈에 바람이 불면 흙먼지가 와서 쌓인다구.
그 흙먼지에 풀씨가 날아와 박혀요. 이 풀씨가 비가 오면 빗방울을 먹고 자라나. 거기선 개가죽나무라고 하는데… 그날 따라 그게 유난히 확대되어 오는 거라. 그래가지고 갑자기 눈물이 터지기 시작하는데 온종일 울었어요. 두 가지를 보고 이유 없이 운거라. 그때 허공이 진동하면서 한 마디 말이 클로즈업이 되는데 그게 ‘생명’이라는 말이에요. … 눈물 속에서 생각한 게 무소부재(無所不在)라.
생명이라는 것은 … 감옥을 뚫고도 들어와 자라. 사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이 안에 빈대도 살아, 쥐들도 와, 외로울 게 없어. … 생명이라는 것이 무소부재니까 내가 담 안에 있으면서도 동시에 밖에 있을 수 있잖아요?
사실 대지는 담으로 막아놔도 연결되어 있잖아요? 하늘과 공기도 담 너머로 하나로 연결되어 있잖아요?”(김지하, 사상기행-신인류를 꿈꾸며, 실천문학사, 1999, 25~7)
민중과의 임장을 파괴하려고 쌓아 올린 담이 생명의 임장까지 막지는 못한다. 이 ‘들풀의 계시’ 앞에서 김지하에게 새로운 임장의 길이 열리기 시작하였다. 온생명과의 우주적 임장이. 존재하는 모든 것과의 생태적 임장이. 그리하여 살아 꿈틀거리는 모든 것과의, 그리고 다시 민중과의 새로운 연대가.
그러므로 김지하에게서 ‘생명’은 무슨 책상에서 논하고 말 사상이 아니다. 그것은 감옥에 갇혀 신음하던 김지하 자신의 생명이고, 창살벽 틈을 뚫고 살아나온 끈질긴 ‘들풀’의 생명이다. 감옥까지 찾아와 생명을 새롭게 깨닫도록 다리가 되어 준 저 빈대와 쥐, 하늘과 바람과 햇살이 어우러진 통의 생명이다.
이를테면 김지하는 야훼를 신고 감옥까지 나아가서 민족과 민중의 바닥으로 그들과 함께 그분의 생명의 길을 가는 과정에서 새롭게 생명의 임장 지평을 확장시켜 가는 은총을 노래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저 ‘생명’이 ‘정의’를 먹고 자랐다는 사실을 간과하거나 하느님의 생태적 임장이 하느님의 정의를 통으로 싸안고 있다는 진리를 모르면, 김지하의 ‘생명’ 이야기나 현대 가톨릭 교회의 생태 영성 비전을 바로 이해하기란 대단히 어려울 것이다.
황종렬(미래사목연구소 복음화연구위원장)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