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통은 원활하신가요?”
신학을 ‘소통’이라 보고, 삼위일체의 자유와 상호 존중에 근거한 사랑의 통교에서 토착화 신학의 원형을 찾았다. 그리고는 입과 머리, 마음, 그리고 온몸으로 추구하는 하느님의 생명의 다스림에 대한 응답으로서 토착화의 구체적 실상을 살펴보았다.
하느님은 “있어라” 하셔서 있게 하고, “생겨라” 하셔서 생겨나게 하고는 그것들을 보시며 “좋다” 하신다. 사람을 포함하여 생겨나 있게 된 모든 것이 그것들로 살도록 당신의 질서를 소통시켜 주시고, 그것들에게 제각각 복을 내려주신다. 이를테면, 하느님의 창조란 하느님의 ‘축복의 소통’인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죄란 소통의 파괴를 뜻한다. 실로,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고 하느님의 생명의 법을 거스른 것은 하느님과 이들 사이의 소통의 단절을 드러낸다. 카인이 아벨을 죽인 죄행은 하느님과의 소통이 부실할 때 사람에게 치명적인 폭력으로 귀결될 수 있음을 말해 준다.
이것은 인간 사이의 소통의 단절이 하느님과의 관계에서도 그대로 작용한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 주기도 한다.
출애굽 사건의 핵심도 바로 여기에 있다. 파라오는 히브리인들이 하느님께 예배드리러 가는 것을 가로막았고, 이 소통 차단 세력이 히브리인들을 억압하며 노예로 부렸다.
하느님과의 소통을 막지 않고는 그분이 생명의 하느님이신 한에는, 영적으로든 사회·정치적으로든 생명을 질식시키는 불의를 수행하기란 불가능한 일이다.
예언자란 누구인가? 단순히 미래를 미리 알아맞히는 존재를 뜻하는 것이 아니다. 예언자란 하느님의 뜻을 소통시키는 자다. 하느님의 마음을 전달받고 그분의 생각을 고지받아서 그분의 입 구실을 하는 존재, 하느님이 바라시는 축복을 소통시키도록 온몸으로 길을 여는 존재, 그들이 예언자다.
예수께서 오신 궁극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하느님이 세우신 축복의 구조가 당대의 종교 지도자들과 정치 지도자들에 의하여 독점되면서 죄가 차고 찼다고 했다.
이에 하느님은 당신을 비우셔서 우리 가운데 텐트를 치셨다. 그것도 외양간 말구유를 침대 삼으시고, 사람 가운데서도 가장 작은 갓난아기로 오셨다.
바오로 사도는 예수께서는 죄 말고는 모든 면에서 우리와 같으셨다고 선언한 적이 있다. 이 말은, 우리의 관점에서 예수께서 우리와 같으셨지만 하느님의 축복을 소통시키는 면에서는 우리와 같은 한계를 갖고 있지 않으셨다는 것을 뜻한다.
이 소통의 축복 사건을 이땅에 육화시키기 위하여 나선 이들이 있었다.
정약용도 그런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가 자기의 존재를 걸고 침묵으로 예수를 지켜 간 영기(靈氣)를 통하여 유배를 하느님의 보우하심(天佑)으로 체험하는 가운데 새롭게 떨쳐일어났다.
실패와 부족에도 불구하고, 그 역시 예수를 닮아서 민중에게 축복을 소통시키는 일에서 등을 돌릴 수 없었기 때문이었으리라. 그리하여 마침내 귀천하기까지 하느님이 태초부터 허락하셨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회복시키신 그 원축복의 소통을 설득하였던 영혼, 그가 정약용, 두물머리의 영이었다.
이 정약용이 말했다.: “하늘이 백성을 내어 그들에게 토지를 주어서 먹고 살게 하고, 또 그들을 위해 군주와 목민관을 세워서 그들이 백성의 부모가 되게 하여, 그 산업을 골고루 마련해서 다 함께 살도록 하였다.”
온 백성은 하느님의 축복을 누릴 존재로 태어났고, 군주와 관료는 하느님이 소통시키고자 하시는 그 축복을 더욱 풍요롭게 소통시키기 위하여 존재한다. 신학 역시 이를 위하여 존재하고, 사목자 역시 이를 위해 존재한다.
이 근본 사명에 비추어 정약용이 묻는다.: “그런데도 군주와 목민관이 된 사람은 힘센 자들이 남의 것을 강탈해서 제 것으로 만들곤 하는 것을 보고서도 팔짱만 낀 채 방치하여 강한 자는 더 차지하고 약한 자는 떠밀려서 땅에 넘어져 죽게 한다면, 그 군주와 목민관은 과연 군주와 목민관 노릇을 잘 한 것일까?”(‘전론’ 1, 다산시문집 5, 81에서 자유롭게 인용)
이를테면 공동체란 관계와 소통의 장이고, 지도자의 존재 이유는 천지인(天地人)의 관계 속에서 천부(天父)의 뜻과 기운을 역동적으로 소통시키는 데 있다.
공동체에서 하느님의 축복을 건강하게 소통시키려면 영의 맑음과 통의 식별력이 요청되는데, 우리 교회는 이 면에서 어떤 단계에 와 있는가?
황종렬(미래사목연구소 복음화연구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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