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을 닮아가고 싶은 나의 작은 사랑 이야기
내가 맡고 있는 본당은 행정구역상으로는 도시에 속해 있지만, 풍경은 아직도 농촌의 그것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며칠 전에는 민족 고유 명절인 설을 지내고 보름을 맞아 나락을 벤 빈 논에서 쥐불놀이를 했는데, 모두가 어린 시절의 동심으로 돌아가 즐거운 한때를 보냈다. 너른 들과 논밭, 파아란 풀들이 새 생명을 싹틔우고 있는 논두렁 위 정경이 둔탁하고 메마른 마음에 희망을 선물해준다.
뿌리고 심는 것은 어느 것이나 신성한 것이다. 사람의 탄생이나 농사를 시작하는 일에 있어서도 어느 하나 정성이 들어가지 않으면 이루어질 수 없다.
모든 곡식들은 농부들의 발걸음 소리를 듣고 싹트고 자란다고 말한다. 땅의 소중함을 아는 농부들은 땅이 발자국소리나 어떤 자극에서도 놀랄까봐 신발을 벗고 맨발로 땅을 걸어 다니는 지극 정성을 보여준다.
새 생명은 연하고 부드러운 특성을 가지고 있다. 봄에 피어나는 새순이나 씨앗이 터트리는 새싹은 모두가 연약하고 부드럽다. 어린이의 눈빛과 살갗이 얼마나 부드럽고 연약한가. 그러나 그 내면에는 보이지 않는 무한한 성장의 에너지와 희망이 담겨져 있다.
마찬가지로, 사람의 생각이나 마음가짐이 부드럽고 온화하다면 위대한 힘과 생명을 담고 있다는 표시이다. 하느님께서는 생명의 근원은 사랑이며 그 사랑은 온유하다고 말씀하신다. 미소 띤 표정, 부드러운 눈매, 겸손한 인사가 그 사람의 됨됨이를 더 높여주는 역할을 한다. 초도 부드러운 액체로 변해야 비로소 빛을 내며 탈 수 있고 소금도 녹아야만 짠맛을 낼 수 있다.
농부는 한해 농사의 시작을 땅을 부드럽게 하는 일부터 시작한다. 땅을 잘 알고 농사일에 능숙한 농부는 봄이 오면 논밭에 나가 얼어 있고 굳어 있는 땅, 거칠고 딱딱한 흙을 깊이 갈고 잘게 부수어 자신의 손바닥보다 더 부드럽게 한다. 굵은 흙 알갱이를 잘게 부수어 나가다보면 보들보들한 흙고물이 된다. 그렇게 해서 땅에 씨를 뿌리면 씨앗은 부드러움과 따뜻함과 촉촉함 속에서 싹이 돋고 키가 자라 자기 이름의 좋은 열매를 맺게 될 것이다.
이렇듯, 세상의 좋은 것은 모두 부드러움으로 출발한다. 그 부드러운 흙에 농부는 씨앗을 넣는다. 그것이 새봄에 농사를 시작하는 농부의 첫 작업이다. 씨앗(씨알)이 물을 만나면 정신없이 물을 빨아 당긴다. 마치 새 생명이 엄마 젖을 정신없이 빨아먹듯….
흙 속에선 모든 미생물들과 벌레들이 잘 썩어야만 씨앗을 틔울 수 있는 거름을 만들어내고, 씨앗은 자라서 좋고 튼실한 열매를 맺기 위해 인고(忍苦)의 시간을 기다려야한다. 그것이 바로 농사이며 우리네 삶의 여정이다.
어찌 우리는 그리도 서두르고 바빠야 하는지….
허정현 신부 (수원교구 당수성령본당 주임)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