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속에 신앙 녹아든 ‘가톨릭 국가’
기도 일상화…성당 주일미사 10여회
성직자들 사회·정치권에 영향력 커
7100여개의 크고 작은 섬들로 이뤄진 섬의 나라. 아시아에선 유일하게 전체 인구의 80% 이상이 가톨릭 신자인 나라. 수도는 마닐라.
평범한 한국인들이 알고 있는 필리핀(Republic of the philippines)의 대강이다. 좀 더 꼽으라면 ‘외국인 노동자’ ‘가난’ ‘영어를 능통하게 하는 아시아인’정도일 게다.
“그게 다가 아니야. 필리핀처럼 놀라운 저력과 가능성을 가진 나라도 드물어. 필리핀에는 분명 뭔가 중요한 ‘그 무엇’이 있을 거야.”
‘아시아를 가다’ 취재를 위해 필리핀으로 떠난다는 말에, 한 원로 사제가 전해 준 말이다. “로마 교황청에선 아시아를 대표하는 가톨릭 국가로 필리핀을 꼽고 있다”는 말과 함께였다. 필리핀의‘그 무엇’을 알기 위해 비행기 안에서 필리핀 관련 자료들을 검토했다.
아시아 남동 해안에서 약 800㎞ 떨어진 곳에 위치. 육지면적 약 30만㎢. 인구 850만여명. 공용어는 영어와 따갈로그어(필리핀어), 화폐 단위는 필리핀 페소(Peso), 인구 80% 이상이 가톨릭 신자인 가톨릭 국가….
‘가톨릭 국가’라는 단어가 주는 친근감 때문일까. 필리핀이 가깝게 느껴졌다. 실제로 지리적으로도 가깝다. 한국에서 남남서 방향으로 비행기를 타고 가다보면 대만 다음에 만나게 되는 나라가 바로 필리핀이다.
“이쯤이면 필리핀에 대해선 거의 다 알았다.”
하지만 자료를 통해 본 필리핀과 피부로 느낀 필리핀은 달랐다. 공항에 마중 나온 살레시오회 최원철 부제는 “한국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를 느낄 수 있을 겁니다. 다른 아시아의 나라와는 다른 가톨릭의 나라를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최부제는 필리핀에서는 가톨릭 신자가 ‘거의 전부’이다 보니, 동창회와 각종 단체 모임에서 미사가 빠지지 않는다고 했다. 기도가 일상화 되어 있다는 것이다. 또 필리핀의 각 성당 주일미사는 평균 10여회에 달한다. 그만큼 성당을 찾는 신자들이 많다는 얘기다. 성당에서 미사를 봉헌할 수 없는 신자들은 대형 할인매장이나 공원 등 공공장소에 열리는 미사에 참례한다.
택시, 버스 안은 물론이고 집과 상점 등 어디를 가더라도 성모상 등 성물을 볼 수 있다.
주교나 신부의 말 한마디가 정치권에 큰 영향을 미치고, 각종 가톨릭 기관 단체에 대한 정부 차원의 혜택도 많다.
한국처럼 특별히 ‘가톨릭 신문’이라고 할 만한 가톨릭 언론 매체도 없다. 모든 신문, 방송 등이 모두 말 그대로 가톨릭 신문이고 가톨릭 방송이기 때문이다.
최부제가 마카티와 마닐라 중심부로 안내했다. 필리핀 첫인상은 ‘화려함’이었다. 할인매장 마다 값비싼 물건들도 넘쳐났고, 사람들의 의상도 화려했다. 마닐라 중심부의 높게 솟은 마천루에선 일련의 정치적 어려움을 이겨내고 도약하려는 필리핀인들의 의지가 읽혀졌다.
필리핀 신앙의 역동성은 뜻밖의 장소에서 만날 수 있었다. 마닐라의 루네타 리잘 공원(Rizal Park, Luneta) 대공연장에서 열린, 신앙대회 현장. 휴일을 맞아 본당, 직장, 학교 등지에서 5만 여명에 이르는 이들이 모여들었다.
찬양이 시작되자 한마음으로 박수를 치며 주님을 찬미했다. 남녀노소가 따로 없었다. 5만명이 팔을 하늘로 든 채, 한 목소리로 주님을 찬양하고 몸으로 은총 충만함을 만끽하는 그 모습은 감동 그 자체였다. 한국에선 한 번도 볼 수 없었던 장엄함이었다.
하지만 이 같은 흥분과 감흥은 얼마 지나지 않아 인근 똔도(Tondo) 빈민촌 지역을 방문하면서 이내 사그러졌다.
빈민촌 지역 사진 촬영을 위해 택시에서 잠시 내리겠다고 하자, 운전기사가 말렸다. 위험하다는 것. 택시 운전기사는 안전을 책임질 수 없다고 했다. 할 수 없이 택시 안에서 창문을 열고 사진촬영을 해야 했다.
사람이 살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상하수 시설이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았고, 대낮인데도 술에 취한 사람 3~4명이 길가에서 잠을 자고 있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마닐라 지역에서 판자집 등 열악한 주거환경에 거주하는 사람은 전체 인구의 50%에 달한다. 택시 운전사는 “정부와 교회는 이들을 위한 대책을 거의 내 놓지 못하고 있다”고 했다.
필리핀에서 사립고 교사 월 임금은 한국돈으로 20여만원(1만 페소)에 불과하다. 그나마 이정도 수입이면 괜찮은 편에 속한다. 일반 직장인 월급은 7만원에서 15만원선. 하지만 마닐라 중심부의 한 백화점에서 본 물건들은 모두 2~5만원대의 고가였다. 엄청난 빈부격차. 주님을 찬미하는 행복에 흥겨워하던 수많은 군중들. 그리고 그들의 뒤편에서 가난과 굶주림으로 희망을 잃고 살아가는 사람들.
필리핀 교회 고민의 한 단면을 들여다 보며 필리핀에서의 하루는 그렇게 저물어 갔다. 숙소인 교황청 설립 필리핀 살레시오 신학대학교 기숙사에 도착한 시각은 밤 9시. 멀리서 술 마시는 사람들의 수다가 들려왔다. 어렵고 힘든 하루를 보낸 가난한 이들이 속 풀어내는 소리였다. 필리핀의 밤은 무덥고, 답답했다. 한참동안 뒤척이다 겨우 잠에 들었다.
“교회, 가난한 이에게 희망줘야”
◎마닐라 대교구 파빌로 보좌주교
“가난한 이들이 너무 많습니다.”
마닐라 대교구 파빌로(Broderick S. Pabillo) 보좌주교는 필리핀 교회의 당면과제를 묻는 질문에 가장 먼저 “가난”을 이야기했다.
파빌로 주교는 최근 필리핀 언론과 국민들로 부터 높은 지성과 사회를 읽는 식견, 가난한 이들을 위한 애정을 가진 인물로 주목 받는 주교. 심지어 필리핀 사회에선 그를 두고 ‘가난한 이들을 위해 하느님이 보내주신 주교’라고 불르기도 한다. 그런 그의 입에서 ‘가난’이 가장 먼저 나온 것은 당연했다.
“마닐라 대교구 신자중 50% 이상이 판자집에서 생활하고 있습니다. 수 많은 신자들이 비참한 환경에서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현실을 외면할 수 없습니다.”
“가난한 이들을 통해 단순성, 하느님에 대한 신뢰, 서로 돕는 것, 다른 사람을 위해 시간을 내어주는 것을 배울 수 있었다”는 파빌로 주교는 “문제는 ‘선량한’ 그들에게 어떻게 복음을 전하고 또 가난에서 극복할 수 있게 하는가 하는 점”이라고 말했다.
파빌로 주교는 “국가가 곧 교회(국민 대다수가 가톨릭 신자)라는 의미는 국가의 고민이 곧 교회의 고민임을 의미한다”며 “필리핀 교회가 사회에 목소리를 내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고 말했다. 그래서 “정치인들을 변화시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정치인들이 말로는 가난을 이야기하지만 실제로는 가난을 위해 일하지 않는 것을 ‘신앙적 관점에서 회개하도록’바로 잡아야 한다는 것이다.
파빌로 주교는 또 복음선포의 과제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신자 수는 많지만 사제수가 적어서 사회 구석구석에 교회가 다가가는 것이 어렵다고 말했다. 쉬는 신자 문제, 선교사 양성, 공소 활성화, 신앙 쇄신 등에도 신경을 쓸 계획이라고 밝혔다.
“필리핀은 해야 할 일이 많습니다. 일단 스스로 복음화를 완성해야 합니다. 다양한 프로그램을 통해 진정한 복음화를 이뤄야 합니다. 가난을 극복해야 하고, 고통받는 이들의 좌절을 희망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그 다음에 아시아 복음화의 주축이 되어야 합니다. 아시아에서 가톨릭 신자 비율이 가장 높은 나라가 필리핀입니다. 필리핀과 아시아의 진정한 복음화, 이것이 필리핀 교회가 완성해야할 미래입니다.”
사진설명
▶리잘 공원에서 차로 5분 정도 거리에 위치한 똔도 빈민촌.
▶마닐라 시내 리잘 공원에서 열린 대규모 신앙대회에서 고등학교 학생들이 찬양을 하고 있다. 남녀노소 따로 없이 모두가 팔을 하늘로 든 채, 한 목소리로 주님을 찬양하고 몸으로 은총의 충만함을 만끽했다.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