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십자가 - 죽음의 길 -
죽어야 산다는 진리
겨울 철새 떼가 하늘을 나는 광경을 보면 장엄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수천 마리의 철새가 떼를 지어 이곳저곳으로 나는데, 신기한 것은 서로 부딪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수천만 마리 메뚜기 떼의 이동을 보아도 그러하고, 수만 마리의 벌떼들이 꿀을 물어 나르는 모습을 보아도 그러합니다.
자연계에서 부딪치는 것은 만물의 영장이라 자부하는 우리 인간들뿐이 아닌가 싶습니다. 서로 자기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하여, 더 가지기 위하여, 자존심을 버리지 않으면서 시기와 질투, 욕망과 이기심의 아귀다툼을 벌이기 때문입니다.
결과적으로 자기 자신을 죽이지 않기 때문에 남도 죽이고 저 자신도 죽는 것입니다. 내 자신을 죽일 때 나도 남도 살 수 있다는 진리를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는 끊임없는 충돌과 아픔 속에 살아가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루카 9, 23).
스승 예수님께서는 화려한 왕관이나 세상의 권세를 얻으려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야말로 당신도, 우리 자신도 살리시기 위하여 당신 자신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기 위하여 비통한 마음으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것입니다. 당신은 제자들에게 이미 여러 차례 수난을 예고 하셨습니다. 죽어야 살 수 있다는 진리는 당신 지상 공생활 가르침의 핵심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스승의 참혹한 수난 예고를 듣고도 자리다툼을 벌이는 촌극을 연출합니다. 군림하고 싶고, 세도를 부리고 싶은 욕망을 그대로 드러냅니다. 그래서 또다시 제자들 사이에 충돌이 일어납니다.
세례성사를 통하여 모든 것을 끊어 버리고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맹세한 우리 역시 그 꼴불견의 모습을 자주 답습하고 있습니다. 스승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끊임없이 죽으시는데, 정작 우리는 자신을 버리지 않으면서 살려고 버둥댑니다. 자기를 죽이지 않으면서 영원한 부활을 꿈꾸는 자기모순의 이중적 신앙인이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또한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한다.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마태 20, 26~28).
이것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이유입니다. 이 목적을 완성시키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는 먼저 죽어야 산다는 진리를 몸소 행동으로 우리에게 일깨워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 마음과 돌아갈 곳
태어나실 때에도 방한 칸 없으셨으며 먼지 나는 팔레스티나 땅을 돌아다니셔야 했고, 반대자들의 모함 때문에 머리 둘 곳조차 없으셨던 예수님께서 인간을 너무도 사랑하셔서 모든 것을 내어 주시고자 예루살렘에 입성하십니다. 백성은 ‘호산나’로 환호하고, 제자들은 비로소 권세의 첫 자리를 차지할 꿈에 부풀어 있는데, 오직 한 분 예수님만이 비통한 심정이셨습니다.
이제 당신을 기다리는 것은 반대자들의 손에 넘겨져 참혹한 죽음의 형틀인 십자가만이 있을 뿐이었습니다. 예수님의 귀에는 열광의 환호 소리가 들릴 까닭이 없습니다. 다만 그분의 가슴 깊숙이에는 이 같은 죽음 끝에도 회개하지 않는 불쌍한 인간의 모습에 가슴이 미어질 따름이었습니다. 그래서 탄식하시며 눈물을 흘리십니다.
“오늘 너도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 그러나 지금 네 눈에는 그것이 감추어져 있다”(루카 19, 42).
2천년 동안 이 눈물, 이 탄식의 말씀을 보고, 또 들었건만 도대체 우리 눈에는 무엇이 씌여 그것을 못보고, 우리 귀에는 무엇이 막혀 그것을 들을 수 없는지, 예수님께서는 안타까울 뿐이셨습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사람아, 사람아!” 하시는 말씀이 오늘도 우리 귓전을 울리는데 말입니다.
예루살렘은 다윗 왕이 이룩한 이스라엘의 영원한 도읍입니다. 이름의 뜻은 ‘평화의 창건’, ‘평화의 집’입니다. 예루살렘은 과거 이스라엘의 조상들이 피눈물을 흘리며 지켰던 곳이며, 현재 수많은 굴곡의 역사에서도 지켜야 하는 곳이며, 미래 자신들의 후손이 돌아가야 하는 약속의 고향인 것입니다.
우리 역시 돌아가야 할 천상 예루살렘을 꿈꿉니다. 그곳은 예루살렘의 이름처럼 이 지상에서 누리지 못할 영원한 평화가 깃들어 있는 하느님의 도성입니다. 환호와 열광은 그곳에서만 들을 수 있습니다. 이 지상에서 내 자신을 끊임없이 죽여야만이 갈 수 있는, 바로 평화의 집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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