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벌려고 미8군 무대서 노래
무명가수 시절
어릴 때 어떤 아이였어요? 라고 누군가 물어보면 나는 ‘문학소녀’였다고 기억한다. 커가면서 책을 읽고, 글을 쓰는 것은 내 곁에서 떠나지 않은 소중한 작업이었다.
더 오랜 기억을 더듬어보면 영화를 너무도 좋아한 여섯 살 어린 소녀가 단박에 떠오른다.
당시는 한국전쟁의 후유증으로 경제적으로 매우 힘든 시기였다. 엄마는 전쟁으로 고향을 잃고 아버지마저 병으로 힘든 하루하루를 잇기 시작하자 부산 초량시장에 포목가게를 내셨다.
나는 그 시장 한켠은 내 첫 리사이틀 무대였다. 엄마가 지어 준 색동저고리를 쫙 빼입은 내가 ‘무정천리’나 ‘굳세어라 금순아’를 신나게 불러대면 피곤하고 주름진 어른들의 얼굴에도 웃음이 머금어졌다. 그리고 내 손에 동전 몇닢이 주어지면 나는 냅다 극장으로 달려갔다. 엄마의 잔소리를 뒤로 한 채 나는 부산극장에서 영화를 보고 또 봤다. 여섯 살 소녀를 완벽하게 매료시킨 스크린의 힘은 너무 컸다. 아마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내 안에서 영화에 대한 열정이 싹튼 것은. 여섯 살 이후 나는 내 손으로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꿈을 키워왔고, 영화를 만들기 위해 글쓰기 작업에 더욱 몰두했었다.
그러나 문학에 대한 나의 꿈은 내 의지와 관계없이 어느 순간 묻혀버렸다.
내 인생을 돌아보면 굽이굽이 어느 한구석 눈물이 안묻은 곳이 없다. 18세 나이에 나는 오빠 부부의 이혼으로 인해 오갈곳 없이 고아가 되어버린 어린 조카들을 안고 고단한 생활전선에 뛰어들어야 했다.
그래서 나는 미8군 무대에서 노래를 시작했다. 스타가 되기 위해, 꿈을 이루기 위해 노래를 시작한 것은 아니었다. 당시 노래는 나에게는 바로 ‘빵’이었다.
그래도 어린시절부터 음악에 남다른 능력을 보였던 나는 큰 어려움없이 미8군 오디션을 통과했다. 그때 미8군 오디션을 통과하는 것은 서울대 합격하는 것 만큼 어려운 일로 인식됐었다. 첫 오디션에 합격해 활동을 하더라도 해마다 재오디션을 보고 급수를 조정받아야 했다. 급수가 떨어지면 개런티도 떨어지기 때문에 나는 돈을 많이 벌기 위해 그야말로 열심히 노래를 했다.
일을 끝내면 늘상 통행금지가 임박한 늦은 시간에 돌아오는 고단한 일상이었다. 그래도 큰조카의 중학교 등록금을 마련하지 못해 내가 대학을 못갔을 때보다 더 서럽고 가슴 미어졌던 일은 무명가수 시절 나를 절제하고 인내하게 해준 디딤돌이 됐다.
무대에 서는 일은 그야말로 전쟁이었다. 열악한 환경에서도 새로운 팝송이 나오면 그날 바로 다 외어 무대에서 불러내야 했다. 한번에 200여개 이상의 팝송을 읊어댈 수 있을 만큼 열심히 외웠었다.
무명가수 시절, 무교동 맥주홀에서부터 청계천 세운상가에 있는 맥주홀까지 차비를 아끼느라 드레스를 걷어붙이고 뛰어다녔었다.
월급도 제때 못받는, 인기있는 가수들을 대신하는 막간가수로 푸대접을 받으면서도, 월급봉투를 기다리는 엄마와 조카들을 볼 면목이 없어 집앞 대문에서 비를 맞으며 들어가지 못하고 꺼이꺼이 목놓아 울면서도, 몇푼이라도 보태겠다고 밤이면 봉투 붙이는 일을 하시는 엄마와 착하디착한 어린 조카들의 얼굴을 보면 나는 아무리 힘들어도 ‘포기’라는 단어를 생각할 수가 없었다.
그 시절 나는 ‘인간은 패했을 때 끝나는 것이 아니라 포기했을 때 끝나는 것’이라는 말을 늘 가슴에 새기며 살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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