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에게 미사는 생활이자 행복
한국교회를 드러내는 특징과 상징들을 이야기 한다면 무엇이 있을까. 평신도들의 열성, 레지오 마리애(성모신심), 급속한 신자 증가, 풍부한 사제성소, 끊이지 않는 성전 신축, 타 종교에 대한 포용성, 민주화 활동, 성경 공부 열기, 소공동체 운동 등이 떠오른다. 하지만 필리핀 교회를 말할 때는 ‘하나’만 있으면 된다. ‘신방가비’(sinbang gabi)가 그것이다. 신방가비를 들여다 보면 필리핀 교회가 보인다.
#신방가비 1
지난해 12월 18일 새벽 3시, 아직도 세상이 암흑에 뒤덮여 있는 시간. 필리핀에 오면‘신방가비’는 꼭 보아야 한다는 살레시오회 최원철 부제의 재촉에 어렵게 눈을 떴다. 졸음을 간신이 물리치고, 마닐라 근교에 위치한 ‘영원한 도움의 성모 성당’을 찾았다.
믿을 수 없는 광경이 눈 앞에 있었다. 교통편도 없는 시각. 하지만 성당에는 1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북적대고 있었다. 성당 내부는 물론이고 마당과 길거리까지 남녀노소 인파로 넘쳤다. 사람이 너무 많아 대성전과 소성전 두 곳에서 동시에 미사가 봉헌됐다. 아이를 등에 업은 엄마, 손을 잡은 노 부부, 초등학생과 중학생, 젊은이들, 연인들…. 최 부제는 “성당 인근에 거주하는 주민 모두가 모인 것”이라고 설명했다. 수많은 사람이 모였지만 혼잡하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그만큼 미사는 엄숙했다. 전국에 있는 모든 성당에서 성탄 때 마다 되풀이되는 미사 축제. 어느 나라, 어느 교회에서도 볼 수 없는 풍경이다. 신방가비 미사가 끝난 후, 사람들은 어둠 속으로 하나 둘 흩어지기 시작했다.
도시 지역 필리핀인들에게 신앙은 하나의 ‘생활’이었다.
#신방가비 2
도심 지역 성당 뿐만이 아니었다. 다음 날 새벽 3시, 마닐라 인근 꾸빵(Cupang)본당 부니(Buni) 공소를 찾았다. 도시 빈민들이 거주하는 이곳에서도 신방가비는 여전히 성황이었다. 작은 공소 건물안에 50여 명이 가득했고, 공소 주변에도 200여 명이 선 자세로 미사를 봉헌했다. 미사에 참석한 스텔라(43)씨는 “평소 주일에도 많은 신자들이 성당에 오지만, 신방가비 때는 쉬는 신자나, 큰 죄를 지어 신앙생활에 소홀했던 이들도 모두 성당에 모인다”고 말했다.
미사 후 동네 아이들은 좁은 골목길을 돌며 춤을 추고 성가를 불렀고, 어른들도 삼삼오오 모여 이야기 꽃을 피웠다. 신방가비는 어려운 생활속에서도 모처럼 얼굴에 환한 웃음이 피어나게 했다. 도심 중산층 지역 신방가비에서‘생활’을 느꼈다면, 빈민 지역 신방가비에선 ‘축제’가 느껴졌다.
빈민지역 필리핀인들에게 신앙은 ‘행복’이었다.
#신방가비 3
신방비는 일반 신자들에게만 한정된 것이 아니다. 교도소와 구치소, 병원 등에서도 어김없이 행해진다. 그만큼 신방가비는 필리핀인들에게 빠트려서는 안되는 소중한 ‘의식’이다.
셋째 날, 특별한 신방가비를 보고 싶다는 말에 최원철 부제가 마닐라 근교 한 마약중독자 치료 재활센터로 안내했다. 필리핀 살레시오회에서 운영하는 이곳에는 초등학생에서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약 1200여 명의 마약중독자들이 수용돼 있다. 필리핀에선 길거리에서도 쉽게 마약을 구입할 수 있다고 했다. 그래서 길거리에서 생활하는 청소년들이 쉽게 마약에 노출된다고 했다.
마약을 하는 청소년, 특히 소녀들은 매춘과 성폭행, 납치 등의 위험을 늘 안고 있다. 실제로 마약치료센터에서는 직접 낳은 아기를 안고 미사에 참여하는 15세 또래 소녀들을 쉽게 볼 수 있다.
새벽 4시. 1200여 명이 대강당에 모였다. 대부분 삶의 의욕을 잃은 듯, 힘이 없고 무기력한 모습. 하지만 사제가 미사를 시작하자 남녀노소 중독자들은 한마음으로 손을 모았다. 어깨동무를 한 채 춤 추며 성가를 불렀고, 성찬례에선 그 어느때 보다 엄숙하게 성체를 모셨다. 그리고 “다시는 마약의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해 주소서”라고 기도했다. 어릴 때부터 몸으로 익혀온 신방가비는 잠시의 일탈을 회개하고 새로운 삶을 결심하는 계기였다.
미사가 끝날 즈음 서서히 날이 밝았다. 수용자들의 얼굴도 한결 밝아졌다. 15살이나 되었을까. 한 소녀가 환하게 웃으며 “피스”(Peace, 평화)라고 인사했다.
필리핀인들에게 신앙은 ‘뼛속에 스며든 그 무엇’이었다.
◎‘신방가비’란?
‘신방가비’는 필리핀에서 매년 성탄 전 9일 동안 새벽 3~4시에 봉헌하는 미사를 말한다. ‘새벽을 기다리는 미사’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봉헌되는 시간은 새벽 3시, 4시 등 각 본당 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다.
성탄을 앞두고 온 국민이 동시에 참여하는 이 미사는 필리핀 교회 특유의 전통이다. 필리핀인들은 이 시기 9일 새벽 미사에 빠짐없이 참여하면 복(은총)을 받는다고 믿는다.
필리핀에서 일고 있는 네가지 신앙운동
필리핀에서 만난 주교와 사제들은 한결같이 “필리핀 교회는 현재 쇄신 중”이라고 말했다. 새로운 영성운동과 각종 프로그램으로 새로운 도약의 발판을 마련하고 있다는 것이다.
필리핀인들은 특히 1975년 교황 이 필리핀을 방문했을 당시, “필리핀이 아시아에 선교사를 적극 파견해야 한다”는 부탁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내적 복음화와 아시아 선교. 이를 위한 대답이 바로 최근 필리핀에서 일고 있는 4가지 신앙운동이다.
▲그리스도를 위한 ‘함께 하기’(커플) 운동 : 현재 가톨릭신문이 창간 80주년을 맞아 (주)엠에이디 종합건설과 함께 전개하고 있는 집 고쳐 주기 사업과 비슷한 형태의 저소득층 주거개선 프로그램이다. 현재 필린핀 주거환경은 심각한 상황. 마닐라대교구 관할지역 인구 중 50%가 판자집 등에서 생활하고 있다.
이들은 각종 질병에 노출되어 있으며 자녀들은 교육의 기회조차 제대로 제공받지 못하고 있다. 빈곤의 대물림이 심각한 상황. 일단 주거가 안정이 돼야 이 빈곤의 악순환 고리를 끊을 수 있다. 필리핀 교회가 집 고쳐주기 사업에 주력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엘 샤다이(El Shadai) 운동 : 일종의 기도 모임으로, 영적 성장 프로그램이다. 신자들이 함께 모여 기도하고 묵상하며 하느님과의 일치를 모색하는 이 프로그램은 최근 마닐라에서 시작해 필리핀 전역으로 확산되고 있다.
▲새로운(新) 교리교육(Neo Catechetical) 운동 : 교리교육의 쇄신을 꾀하는 프로그램. 기존 주입식 방법이 아니라 실천 중심의 교리교육을 통해 삶 속에 증거하는 신앙을 지향하고 있다. 교육이 무너지면 교회의 미래도 무너진다는 인식에 따른 것이다.
▲기초교회공동체(Basic Ecclesial community) 운동 : 한국교회의 소공동체 운동과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하지만 한국교회의 소공동체가 구역 반을 중심으로 하는 소그룹으로 이뤄진다면, 필리핀 교회의 기초교회공동체는 전문 선교사를 양성, 이들이 직접 교회의 지도자가 되는, 말 그대로의 기초 교회다.
기초교회 공동체 지도자로 훈련받은 이들은 본당내 각 지역에 파견돼 지역 주민들과 함께 삶과 신앙을 나눈다. 기초교회 공동체는 단순히 신앙 공동체의 성격만 띠는 것이 아니다. 신협운동 등 물질적 나눔 운동도 병행, 명실상부한 초대교회 모델을 지향하고 있다. 이 공동체 운동은 이슬람 교세가 상대적으로 강한 민다나오 지역에서 활기를 띠고 있다.
사진설명
▶신방가비 미사에 참례한 신자들로 꽉 찬 마닐라 근교 ‘영원한 도움의 성모성당’
▶도시빈민 지역인 마닐라 인근 꾸빵본당 부니공소에서 신방가비 미사 후 찬양을 하는 아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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