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화·인권수호 주도적 역할
한국을 넘어 아시아 복음화 매진
한국교회, 일제억압 시련딛고 제도·체제 확립
가톨릭시보 1962년 공의회 소식 상세히 보도
시대의 아픔 어루만지며 예언자적 소명 실천
교세 성장 힘입어 받는 교회서 나누는 교회로
사형제 폐지·생명수호 위한 활발한 활동 전개
중국 포함한 동북아시아 선교에 중추적 역할
식민지로 전락한 조선, 그 혹독한 시련 속에서
한국 천주교회는 복음의 씨앗이 뿌리내리고 열매를 맺기 전에 만난 고난과 박해의 터널을 지나 한불수호조약으로 신앙의 자유를 얻었다. 교회는 가까스로 얻은 신교의 자유를 바탕으로 19세기 말과 20세기 초를 거치며 꾸준한 발전을 거듭했다. 하지만 1910년 한일합방을 통해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한 조선 땅, 교회는 그 혹독한 탄압 속에서 민족과 함께 고난의 길을 걸어야 했다.
가톨릭신문이 창간되던 당시, 1927년은 민족 전체의 문맹률 80%, 천주교 신자의 수적 열세, 교구의 교세 등을 감안할 때 만용에 가까운 일이었다.
소식보도, 의견교환, 보조일치라는 세 가지를 사시로 내세우고 시작된 ‘천주교 회보’는 그후 80년 동안 민족과 교회와 함께 격동의 역사를 지켜봐 왔다.
1931년 조선교구 설정 100주년을 맞은 한국교회의 기쁨을 ‘천주교회보’는 “삼천리강산 이 땅에 진리의 빛 천주의 복음이 전한지 1백48년이오 조선교구가 설정된지 백년이다”라며 “우리는 이 날을 긔념하고 축하하며 천주의 진리를 사해에 외치노니 모든 이는 다같이 즐겨 용약하라”고 노래했다.
1933년 5교구 주교회의에서는 ‘가톨릭진행’(가톨릭액션)에 대한 교서를 발표하면서 기존에 발행되던 각 교구의 월간 잡지들을 모두 폐간하고 통합된 매체로서 ‘가톨릭 청년’을 발간하기로 했다.
이에 따라 ‘천주교회보’는 경성의 연합청년회가 발행하고 있던 ‘별’과 함께 발행이 중지됨으로써 16년동안 긴 공백 기간을 갖게 된다.
분단시대의 개막과 한국교회
한국 교회는 일제의 억압 속에서도 꾸준하게 제도와 체제를 확대해나갔다. 전주, 광주, 원산, 춘천교구가 설정됐다.
그러다가 1945년 8월 15일 ‘성모승천대축일’에 광복을 맞았다. 광복 당시 한국 교회에는 총 9개 교구가 있었다. 신자 수는 18만 3666명이고 본당은 163개, 한국인 신부가 136명, 외국인 신부가 102명이 있었다. 특히 이들 신자들의 대부분은 남한에 거주하고 있었는데 약 13만 명 가량이었고 북한에 거주하는 신자는 5만 여명에 그쳤다. 당시 한국의 총인구는 약 3000만명, 남한 총인구 수 2000 만명을 고려할 때 가톨릭 신자 비율은 1% 가량이었다.
광복 이후 이른바 해방정국으로 불리우던 시기, 나라는 혼란스러웠고 국가와 교회 공히 반공은 지상 과제였다. 각종 체제와 제도를 정비해나갔고, 1946년에는 경향잡지 복간에 이어 경향신문 창간과 가톨릭청년 복간이 이뤄졌다. ‘천주교회보’ 역시 1949년에 속간됐다. 1949년 4월 1일에는 1933년 폐간돼 16년 동안 발행되지 못했던 ‘천주교회보’가 다시 발간되기 시작했다. 속간호에서 ‘천주교회보’는 속간의 기쁨과 새로운 다짐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16년 자던 꿈을 홀연히 깨고 보니 나라도 새 나라요 목자도 새목자시다. 감개도 무량하려니와 희망도 한이 없다. 갈길이야 멀지라도 갈림길이 있겠는가. 一왈 소식보도요 二왈 보조일치요 三왈 조국성화다.”(‘천주교회보’ 1949년 4월 1일자 1면 중에서)
교회는 해방된 민족에 대한 봉사를 다짐하며 사회적 기능을 통한 간접 선교에 노력했다. 특히 청년운동과 가톨릭 액션이 왕성해져 ‘대한천주교총연맹’이 결성됐다.
1946년 남한만의 총선거가 실시돼 분단이 기정사실화됐고 1948년에는 남한 단독 정부가 수립됐다. 남한 교회의 발전과 달리 북한 교회는 혹독한 탄압이 가해졌고, 결국 목자 없는 침묵의 교회로 남게 됐다.
민족 상잔의 비극
1950년 한국전쟁은 전국을 초토화했고 한국 사회와 교회 모두에 큰 타격을 주었다. 전쟁 기간 중 교회는 수많은 성직자, 수도자와 지도급 신자들을 잃었고 엄청난 물질적 피해를 입었다.
“…이번에 당한 고난이 우리 민족이 과거에 범한 죄과와 과오를 청산하고 새로운 세계를 건설하기 위하여 천주께서 주시는 시련이라고 할 수 있으며 우리는 이 고난을 甘心으로 참아 받고 또 이것을 사람들의 정화와 성화의 수단으로 알며 더욱 신앙심을 발휘하여…”(천주교회보 1950년 11월 10일자, 대구대교구장 최덕홍 주교 ‘모든 聖職者와 信者들에게’ 중에서).
‘천주교회보’도 6월부터 휴간에 들어갔다. 하지만 11월 10일자로 속간돼 한국전쟁 기간 중에 발행된 유일한 교회 언론이 됐다. 복간된 ‘천주교회보’를 통해 교회는 피해를 복구하는데 주력했고, 종교적 차원에서 전쟁의 상흔을 이겨나가야 한다고 독려하는 한편, 반공의 이념은 더욱 강화됐다.
해외교회의 지원을 받아 구제 사업을 활발하게 펼쳤고 이 원조금을 바탕으로 성당 건립과 사회사업, 교육사업을 펼쳤다. 이러한 전재민 구호 활동은 교세 확장에도 기여해 50년대 신자 증가율이 무려 평균 16.5%에 달했다.
휴전 후 사회적 안정을 회복하면서 각종 단체들이 정비됐고 많은 지식인들이 가톨릭으로 개종해 사회적으로 화제가 되기도 했다.
공의회와 교회 쇄신
교황 요한 23세는 1962년 제2차 바티칸공의회를 개막했다.
“…이번 공의회가 본질적으로 불변의 교리와 다른 어떤 신기한 것을 발견해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현대에 맞추어 바꿀 수 있는 것을 바꾸어 가면서 시대가 주는 위험에서 신자들을 보호하고 신앙생활을 완전히 하도록 하는 길을 연구하고 탐구하는 것뿐이다”(가톨릭시보 1963년 9월 15일자 사설 ‘공의회를 정확히 인식하라’ 중에서).
‘가톨릭시보’는 가장 정확하게 공의회의 진행을 중계했으며 공의회가 모두 마친 후에도 각 문헌들을 소상하게 해설했다. 한국교회는 공의회를 통해 전환기에 처한 자신의 입장을 확인하고 쇄신과 봉사의 자세를 다시 점검했다.
교회의 현대화와 함께 민족과 사회 문제에 대한 능동적인 관심, 일치운동, 타종교와의 대화에도 열린 자세로 임하게 됐다. 공의회를 거치면서 일기 시작한 일치의 기운은 성서 공동번역으로 구체화됐고 이러한 열린 자세는 70년대와 80년대 민주화 투쟁과 인권 옹호, 사회 개발을 위한 연대의 바탕이 됐다.
1966년 주교회의가 정식으로 조직되면서 한국교회의 제도적 발전에 새로운 계기가 마련됐다. 1968년 3월 8일에는 한국 최초로 본사 사장을 역임했던 서울대교구장 김수환 대주교가 추기경으로 서임된다. 가톨릭시보 1969년 4월 6일자는 추기경 탄생에 환호하는 한국 교회의 분위기를 생생하게 전했다.
민주화·사회정의 실현을 위한 투쟁
허리가 잘린 조국에서 교회는 사회 정의를 바로 세우기 위해서, 인간의 존엄성을 말살하는 독재 정권에 대항해서 투쟁에 나서야 했다.
한국교회는 공의회와 급격한 산업화, 독재의 압박 속에서 사회 정의와 인권 수호를 위한 사회 참여가 곧 시대적 요청임을 인식하기 시작한다. 신문 기사에서도 이러한 요청에 대한 인식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으며 이러한 방향을 향한 교회의 움직임이 잘 전해져왔다.
1971년 11월 14일 제4회 평신도의 날을 맞아 한국 주교단은 ‘오늘의 부조리를 극복하자’라는 제하의 성명서를 발표했다. 같은 날 가톨릭시보는 성명서 전문을 1면 전체에 게재했다.
70년대와 80년대 민주화 운동을 위한 교회의 움직임들은 소상하게 가톨릭시보에 보도됐다. 하지만 당시의 정치, 사회상황 아래서 어쩔 수 없이 그 소명을 수행하는데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80년대는 광주의 비극, 그리고 이에 대한 침묵으로 시작됐다. 가톨릭신문 80년 6월 1일자에는 광주 민중 항쟁과 관련해 5월 23일 긴급 소집된 주교회의 상임위원회를 거쳐 발표된 특별기도 요청 서한을 ‘형제적 화해 기반 마련해야’라는 제목의 1면 톱기사로 보도했다. 하지만 광주의 본질에 대한 평가나 정확한 사실 보도는 전혀 이뤄질 수 없었다.
이후 한국교회는 폭압적인 독재정권에 대항해 정치적으로는 민주화, 사회적으로는 인권 수호, 그리고 경제적으로는 가난한 이들과 함께 하는 교회의 예언자적 소명을 충실하게 실천함으로써 최후의 양심의 보루로서 우뚝 선다.
박정희 대통령의 피살, 12.12 사태, 광주 민주화운동, 고문치사 사건의 폭로를 거쳐 1987년 6.29까지, 한국교회는 한국 사회의 민주화 운동 전반을 꿰뚫고 나감으로써 우리 사회의 민주화를 획득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보편교회의 일원
그 와중에도 한국교회는 성장과 발전을 거듭해 명실상부한 보편교회의 일원으로 자리잡았다. 우선 폭발적인 신자 증가율을 보면, 1930년 불과 10만명에 불과했던 교세는 1974년말 100만명을 돌파했고, 1985년말 200만명, 1992년말 300만명, 대희년인 2000년말에는 400만명을 넘어섰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방한과 함께 103위 순교자가 성인으로 탄생했으며 서울 세계성체대회를 통해 세계교회로부터 주목받았다.
전후 원조를 통해 성장의 기틀을 마련한 한국교회는 국가 경제의 성장, 늘어난 신자 수에 힘입어 받는 교회에서 나누는 교회로 성장했고 이제는 전세계로 선교사를 파견하고 있다.
질적 성장의 모색
1992년 한국교회의 전체 신자 수는 300만명을 넘어섰다. 하지만 90년대 들어서며 한국교회는 양적 성장에 버금가는 질적 성숙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된다. 신자증가율은 눈에 띄게 줄어들기 시작했고, 냉담률이 높아지고 성사 참여율이 고질적인 문제로 고착된다.
이는 60년대와 70년대 누렸던 사회적 호감과 80년대 고조됐던 대규모 종교 집회의 파급 효과가 더 지속되지 못함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제 교회는 변화된 시대에 걸맞는 질적 성숙, 영성적인 도약을 모색해야 하는 때가 온 것이다.
이러한 인식에 따라 한국교회는 90년대를 넘어오면서 위기의식과 문제 인식 속에 질적성장을 위한 대책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교회의 사목적 관심 영역도 광범위하게 확장되기 시작했다.
80년대 후반부터 본격화된 민족화해 문제, 90년대부터 시작된 환경운동에 대한 관심, 낙태 반대운동을 중심으로 한 생명운동, 어느 정도 교회 규모가 성장한 뒤 이어지는 해외원조와 선교의 소명, 한국교회의 고유한 순교신심에 대한 본격화된 관심, 정보사회 도래와 함께 이어진 정보화 사업 추진 등 각 부문의 활동이 활성화된다.
새로운 천년기를 열며
2천년 대희년은 세계교회와 한국교회 모두에게 새로운 도약을 할 수 있는 기회로 다가왔었다. 세계 교회와 한국교회는 대희년 개막 전 수년간에 걸친 영적, 신앙적 준비를 다지기 위해 노력했고 이러한 충실한 준비 상황들이 가톨릭신문을 통해 전해졌다.
보편교회의 대희년 준비에 맞춰 한국교회 역시 대희년을 뜻있게 보내기 위해 준비에 만전을 기하고 생활운동으로서 ‘새날 새삶 운동’을 펼쳤다.
“주교특별위원회는 … 대희년의 정신을 실제 삶 속에서 구현하기 위해서는 생활운동이 필요한 것으로 판단, 새날 새삶 운동을 전개하기로 하고 이 운동을 구체화시킬 표어로서 나부터 새롭게, 함께 가요 우리, 좋은 이웃 되어주기, 참된 가정 이루기 등의 표어를 우선 채택하기로 했다.”(가톨릭신문 1998년 3월 8일자)
가톨릭신문은 새로운 세기, 새로운 시대를 연다는 사명감으로 대희년과 관련된 각종 소식과 기획기사들을 통해 한국교회의 신자들이 새로운 복음화를 준비하도록 이끌기 위해 노력했다.
잇따른 교구 시노드 개최
대희년을 보내고 새 천년기를 맞은 한국교회는 새로운 시대의 도전들에 직면해 참된 복음화를 위한 쇄신과 변혁을 시도했다.
한국교회 민주화 운동의 상징이자 온 국민의 정신적 지주였던 김수환 추기경이 마침내 은퇴를 하고 정진석 대주교가 서울대교구장으로 임명됐다.
대구대교구를 비롯해 수원, 인천 등이 교구 시노드를 개최한데 이어 서울대교구도 시노드를 열었다.
이들 교구 시노드들은 제2차 바티칸공의회 폐막 40주년, 그리고 공의회의 한국적 적용이랄 수 있는 한국 천주교 200주년 기념 사목회의 20주년이라는 시의적절한 시점을 전후로 해서 활발하게 개최됐다. 가톨릭신문은 그러한 역사적 배경과 의미를 2004년 의욕적으로 마련한 연중기획, ‘200주년 사목회의를 재조명한다’를 통해 분석했다.
한국교회의 순교 영성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2000년 대희년 기간 동안 신자들에게 전대사의 은총을 부여했다. 이 은총은 특별히 한국교회 신자들에게는 2001년까지 1년 동안 더 연장됐다. 1월 4일 발표된 신유박해 순교 200주년을 기념한 전대사의 은총은 한국교회 신자들에게 순교신심과 영성을 더 깊이 성찰할 수 있는 계기가 됐다. 이 소식을 가톨릭신문은 2001년 1월 14일자 신문에서 전한다.
신유박해 200주년 기념행사는 2001년 한 해 동안 계속돼 신자들의 순교 신심 고취에 크게 기여했다.
2월 2일 개막미사를 시작으로 한국 평협에서는 신유박해 순교자들의 시복시성을 추진키로 했으며 황사영 백서의 진본이 76년 만에 국내에 전시되기도 했다.
특히 주교특위는 이후 124위의 초기 순교자 시복시성 추진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가톨릭신문은 주교특위의 설치와 구성을 10월 28일자 신문에서 상세히 전하고 있다.
도전 받는 인간 생명, 가정과 생명 수호
오늘날 인간 생명은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도 심각하게 도전 받고 있다.
만연한 세속주의와 물질문명, 맹목적인 과학과 의학의 발달은 인간 생명의 존엄성에 대한 전통적인 가치와 윤리를 무시한 채 왜곡된 개인주의와 상업주의로 인해 생명윤리를 일고의 가치도 없는 것으로 전락시키고 있다.
인간 생명의 존엄성을 수호하기 위해 노력해온 가톨릭교회는 기존의 생명윤리 문제들에 더해 새롭게 등장하는 여러가지 생명윤리 문제들에 대처하기 위해 분투하고 있다.
특히 한국 사회 안에서 생명문화의 건설을 위한 교회의 고군분투는 가정의 가치를 수호하기 위한 노력과 가장 미약한 인간 생명, 즉 태아와 배아의 생명권을 수호하려는 노력으로 집중됐다. 아울러, 제도적 살인으로 규정되는 사형제도를 폐지하기 위한 교회의 노력도 강화됐다.
주교회의에 생명수호를 위한 기구와 사형제도폐지를 추진하기 위한 기구들이 속속 설치됐고, 서울대교구는 희대의 과학사기극을 벌였던 황우석 사건을 계기로 배아연구의 대안인 성체줄기세포 연구를 지원하는 생명위원회를 설립했다.
교회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 사회에서 생명의 존엄성을 위협하는 죽음의 문화가 만연해 있음은 결코 교회의 생명수호를 위한 갈 길이 멀다는 것을 의미한다.
높아진 한국교회의 위상과 아시아 복음화
보편교회 안에서 한국교회는 점점 그 위상이 높아져왔다. 그 가장 명백한 증거가 김수환 추기경에 이어 두 번째 추기경으로 서울대교구장 정진석 대주교가 서임됐다는 사실이다. 첫 번째 추기경이 탄생한지 37년만인 2006년에 맞은 큰 경사에 한국 교회와 한국 사회 전체가 크게 환영하고 기뻐했다.
한편 정진석 대주교의 추기경 서임은 한국교회의 위상이 높아진 때문이기도 하거니와 나아가 제삼천년기 보편교회의 아시아 교회에 대한 깊은 관심과 기대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당시 15명의 새 추기경 중에서 3명을 아시아권의 주교 중에서 임명했다.
다원주의 사회에서 정체성의 확립과 복음 선포
오늘날 세속화된 다원주의 사회 안에서 신앙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복음을 선포하는 일은 현대적 의미의 순교라 할 만큼 매우 중대한 사목적 과제로 지적되고 있다.
특히 이같은 과제는 90년대 이후 고질적으로 나타나는 냉담률 증가, 성사생활 소홀, 신자 증가율 둔화 등의 선교적 이상 징후와 함께 이른바 신흥영성운동의 도전, 그리고 대형화한 성당, 형식적 전례, 친교와 일치의 부족 등 사목적 현실 속에서 이는 더욱 시급한 과제로 지적됐다.
이에 따라 각 교구에서는 소공동체의 활성화와 공동사목의 새로운 시도들을 미래 사목의 방향으로 설정하고 다각적인 실험을 하고 있다.
뜨거운 동포애로
북한은 지속적인 식량난에 시달렸다. 한국교회는 이미 90년대말부터 집중적으로 북한 돕기에 나서왔다. 2000년에 들어서는 분단 55년만에 남북 정상이 처음으로 만났다. 남북 관계에 훈풍이 불기 시작하면서 교황의 방북 문제가 그 실현 가능성과 성사 여부를 떠나 깊은 관심의 대상이 되기 시작했다. 가톨릭신문 6월 25일자에는 1면 톱기사로 이같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방북 가능성에 대한 기대를 담았다.
지속적으로 이어지는 남북 화해의 기류 안에서 2003년에는 ‘평화와 통일을 위한 3.1 민족대회’, 8월에는 평양에서 개최된 ‘평화와 통일을 위한 8.15 민족대회’에서 남북한 신자들이 함께 미사를 봉헌하고 기도와 함께 진정한 남북 화합 평화를 위한 염원을 모았다.
2005년에는 성 베네딕도회 독일 오틸리아연합회와 한국교회 등이 함께하는 국제가톨릭의료봉사협회가 8월 5일 함경북도 라선시 연주동에서 라선 국제가톨릭병원 개원식을 가졌다.
2006년에는 서울 민족화해위원회가 추진하는 ‘속죄와 참회의 성당’과 ‘민족화해센터’ 착공식이 있었고, 특히 한국 카리타스가 대북 개발 협력 사업을 주도하게 됨에 따라 이후 대북 지원과 개발에 관련된 국제적인 지원 협력 사업을 한국 교회가 담당하게 됐다.
새로운 시대, 한국교회의 나아갈 길에 대한 모색
제삼천년기에 접어들어 한국교회는 비록 부분적으로 성장통에 시달리며 또 다른 쇄신의 요청을 받고 있지만, 20세기 이후 쇠퇴 일로를 걸어온 서구교회에 비해 여전히 생생한 신앙적 활력을 간직하고, 보편교회의 미래에 있어서 관건이 되는 아시아, 특히 중국을 포함하는 동북아시아의 복음화에 있어서 교두보로서의 역할이 기대되고 있다.
2007년, 한국교회는 산적한 사목적 과제를 해결해나가기 위한 노력을 계속하고 있다. 격동의 20세기를 지나오면서 세상과 사회 속에서 교회의 내적, 외적 소명을 확인하고 실천해온 한국 천주교회는 제삼천년기, 새로운 21세기를 맞아 자신의 신앙적 정체성을 모색하고 시대적 징표에 응답하기 위한 노력을 더욱 강화해야 한다는 요청을 곳곳에서 받고 있다.
사진설명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현대교회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한국교회도 공의회를 통해 쇄신과 봉사의 자세를 다시 점검했다. 사진은 공의회 장면.
▶1987년 6월 부산에서 사제단과 수도자들이 인권회복 침묵시위를 벌였다.
▶일제는 동화정책의 일환으로 신사참배를 강요, 민족혼 말살에 광분했다. 하지만 신사참배 거부로 많은 국민들이 목숨을 잃었다.
▶1984년 5월 3일 한국을 방문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비행기에서 내리며 환호하는 사람들에게 손을 흔들며 화답하고 있다.
▶서울대교구는 1999년 12월 25일 명동성당에서 대희년 개막행사를 가졌다.
▶2001년 9월 16일 서울 동대문운동장에서 열린 순교자 현양 신앙대회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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