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받는 이웃과 착한 사마리아 사람 잇는 튼실한 징검다리 역할 80년
꺼져가는 생명 살린 보도 900여건
해외 재해 재난 보도·지원에도 앞장
‘경남 진주 문산 김신부 본당에 사는 박두석씨는 재산이 그다지 넉넉하지도 못한 처지에 성체 앞에 켜는 등불기름 값 금년 일 년 치 10원을 자신이 부담하고 이후에도 몇 가지를 절용(節用)하고라도 힘대로 부담하겠다고 자원하였으므로 신부 이하 일반 교우들이 이씨의 열성을 감사히 여긴다더라.’(1928년 4월 1일자 2면 ‘진주 문산본당 박두석씨의 열성’ 중)
‘사랑 나눔’은 그리스도인의 주요 사명 가운데 하나다. 가톨릭신문은 지난 80년간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는 우리 이웃 이야기를 독자들에게 알릴뿐 아니라 도움이 필요한 이웃에게 사랑을 전하는 징검다리 역할을 해왔다.
가난에 허덕였던 일제치하와 한국전쟁 후에는 어려움 속에서도 나눔에 앞장선 신자들의 모습이 지면을 채웠고 1970년대 이후에는 어려운 이웃과 단체의 이야기를 싣고 직접 나눔을 호소하는데 앞장섰다.
외환 위기로 온 국민이 절망에 빠지고, 코리안 드림을 꿈꾸던 이주노동자들이 고통을 받을 때에도, 가톨릭신문은 누구보다 앞자리에서 그들의 목소리를 대변해왔다.
주고받는 사랑과 나눔, 그리고 결실의 현장에서 가톨릭신문은 교회 대표언론으로서의 정체성을 확립해왔다.
성체등을 밝히고자 10원을 봉헌한 박두석씨의 이야기부터 2007년 ‘천사운동’까지 가톨릭신문의 사랑 나눔 발자취를 짚어본다.
평생 모은 억대 재산을 신학생 양성에 써 달라며 쾌척한 할머니, 휴일마다 복지시설을 찾아 미용봉사를 하는 이발사, 같은 처지의 소년을 돕고자 성금을 모은 구두닦이 소년들, 수해를 입은 신자들을 돕기 위해 팔을 걷어붙인 봉사자들….
가톨릭신문은 ‘인터뷰’, ‘이주에 만난 사람’, ‘화제의 인물’ 등 각종 기획과 사람들면을 통해 몸소 선행을 실천하는 신자들의 이야기를 담았다. 특히 해외 각국의 원조가 이어지던 1950~60년대에는 벽안의 외국인 성직자와 수도자들이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을 위해 헌신하는 모습을 보도했다.
80년간 거의 매주 지면에 실린 미담은 신자들이 사랑의 참된 의미를 깨닫고 작은 관심이 큰 열매로 거듭나고 있음을 체험하는 계기였다.
#도움 하나-새 생명을
가톨릭신문은 나눔의 현장을 드러내는 것에서 한발 더 나아가 나눔이 필요한 곳을 직접 찾아 보도하고 신자들의 사랑을 호소했다. 도움 호소기사는 ‘사랑의 교차로’, ‘사랑의 고리운동’, ‘사랑의 손잡기 운동’, ‘나눠줄 사랑 없나요’, ‘도움호소’ 등을 거쳐 현재는 ‘사랑, 나눌수록 커집니다’와 ‘천사운동- 날개달기’로 이어지고 있다.
특히 기사의 대부분은 가난 때문에 힘겹게 병마와 싸우는 이들의 안타까운 소식이 대부분을 차지했다. ‘눈을 팔아 휠체어를 사야한다고 호소하는 진낙엽씨’(1970년 9월 20일자)부터 ‘아버지는 폐혈증, 어머니는 중풍으로 사투하는 김문영씨 가정’(2007년 3월 11일자)에 이르기까지 본지는 2주 혹은 3주에 한 번씩 병으로 고통 받는 가난한 이웃들의 이야기를 싣고 신자들의 도움을 청했다. 60~70년대에는 고아나 한센병 환자 집성촌의 어려움을 호소하는 내용이 주를 이뤘던 반면, 2000년대 들어서는 산업재해로 고통 받는 이주노동자들의 이야기가 많아 변화된 사회 모습을 간접적으로 엿볼 수 있었다.
꺼져가는 생명을 구하는데 동참하자며 소개된 기사는 지난 80년간 900여건. 가톨릭신문과 사연 주인공에게 답지한 성금은 어림잡아 100억 원에 이른다. 환율 변동을 감안하면 성금액은 이보다 훨씬 많을 것으로 추산된다.
나눌수록 커져 넘쳐버린 엄청난 성금액은 가톨릭신문 기사에 화답한 수많은 은인들의 덕분이었다. 초등학생들은 저금통을 깼고 천 여 만원이 넘는 거금을 익명으로 기부한 신자도 있었다. 성금 뿐 아니라 직접 장기를 기증하겠다거나 헌혈증을 이웃과 모아 보내온 경우도 있었다.
때론 성금이 전해지기 전 하늘나라로 떠나 안타까움을 주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사연 주인공들은 신자들의 성금에 큰 힘을 얻어 건강을 되찾고 감사 편지를 보내왔다.
#도움 둘-사랑의 벽돌 한 장
성당이나 공동체 건물을 짓는데 어려움을 겪는다는 사연이 전해져 직.간접적으로 힘을 얻고 보금자리를 꾸린 공동체도 많다.
도서와 산간벽지에서 성당을 짓기 위해 피땀을 흘리는 신자들의 노력, 화마(火魔)로 성당을 잃고 실의에 빠져있는 신자들, 자재 값이 뛰어올라 공사를 중단할 수밖에 없었던 사연이 전해지자 전국 방방곡곡에서 후원이 쇄도했다.
거제도공소(1960년), 완도본당(1977년), 함평본당 문장공소(1977년), 도척본당(1979년), 누동공소(1982년), 고한본당(1985년), 소화자매원(1986년), 판암동본당(2000년), 신녕본당(2000년), 의성본당(2001년), 석문동본당(2002년), 아네트의 집(2004년), 용잠본당(2004년) 등 가톨릭신문을 통해 소개된 수많은 교회 공동체는 신자들의 십시일반 정성으로 보금자리를 꾸밀 수 있었다.
#도움 셋-사랑 나눔 캠페인
가톨릭신문은 또한 한국교회 차원에서 펼쳐지는 각종 캠페인과 나눔 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해 신자들의 동참을 이끌어냈다.
태풍과 지진 등 자연재해로 고통 받는 이웃을 돕기 위한 나눔 캠페인은 1960년 태풍 ‘사라’호 피해 구호 캠페인을 시작으로 남원지역 장마피해(1961년), 가뭄피해(1968년) 때도 계속됐다. 가장 최근에는 강원도 영서지방 폭우피해(2006년) 현장을 취재한 뒤 각 교구 사회복지회와 함께 공동모금 행사를 가졌다.
자연재해 구호 캠페인은 2000년대 들어 국경을 넘었다. 수십 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인도네시아 지진해일(2004년), 파키스탄 대지진(2005년), 인도네시아 지진(2006년) 때는 주교회의 사회복지위원회, 한마음한몸운동본부 등과 함께 모금 캠페인을 펼쳤다.
사랑나눔을 촉구하고 각종 캠페인을 독자적으로 혹은 교회 기관과 손잡고 전개해 나갔다. 1961년 한센병 환자들의 처우개선을 청하는 특집기사를 게재한 것을 비롯해 1983년부터 1986년까지는 한국교회 차원에서 전개한 ‘200주년기념 개안수술’ 소식을 보도했다. 1994년 8월에는 주교회의 사회복지위원회와 함께 ‘르완다 난민 돕기’ 특별모금운동을 펼쳐 3억8천 여 만원을 모금했다. 2001년에는 해체된 가정의 회복을 기원하는 의미로 ‘소년소녀가장을 도웁시다’ 캠페인을 전개했으며, 2003년에는 대구지하철참사 유가족 돕기 성금 모금 행사를 가졌다.
특히 2000년대 들어서는 생명 존엄성을 확산시키기 위한 캠페인이 주를 이뤘다. 한마음한몸운동본부와 함께 2001년부터 3년간 사순절 생명 나눔 캠페인을 갖고, 장기기증·골수기증에 대한 인식 확산을 위해 노력했으며 백혈병 어린이를 직접적으로 돕는 모금 캠페인도 가졌다.
80년간 전개돼 온 가톨릭신문의 사랑 나눔은 올해 창간 80돌 기념 ‘사랑의 집 고쳐주기’, 주교회의 사회복지위원회·한마음한몸운동본부 등과 전개하는 ‘천사운동’으로 이어져 나눔의 결실을 계속 수확해 나가고 있다.
사진설명
▶본지는 해외 재해 현장에 직접 기자를 파견, 한국교회의 나눔을 호소했다. 지난해 지진으로 큰 피해를 입은 인도네시아 족자카르타에서의 구호활동 모습.
▶신자들의 도움으로 백혈병을 이겨내고 올해 수원가톨릭대학교에 입학한 김영웅씨(앞줄 왼쪽에서 두 번째)가 입학 동기들과 함께 밝게 웃고 있다.
▶박명근 신부(2005년 당시 서울가톨릭사회복지회 부회장)가 스리랑카 카리타스 총재 레이몬드 주교에게 지진해일 구호성금 20만불 지원 증서를 전달하고 있다.
▶원시신경외배엽성 종양 앓는 김현영양. 신자들의 도움으로 치료를 받고 건강을 회복하고 있다.
▶전신3도 화상을 입고 절망의 나락에 빠져있던 베트남 노동자 혜인씨는 신자들의 나눔으로 치료를 받고 2005년 고국으로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