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문화·예술 각 분야서 헌신하며 교회위상 드높여
뮈텔 대주교, 한국교회 토착화·현대화 공헌
한국교회 창설주역 이벽·이승훈·권철신·정약전-약용 형제
조선교구 1대 주교 브뤼기에르 주교·내포의 사도 이존창
한국교회 최초 사제 성 김대건 신부·땀의 순교자 최양업 신부
교회사 연구 기틀 놓은 달레·한국인 최초 수녀 박황월 수녀
한국 근대교회 기초 다진 대구교구 초대교구장 드망즈 주교
국채보상운동 일으킨 서상돈·참 신앙인 모범 보인 장면 박사
[전문] 가톨릭신문사는 창간 80주년을 맞아 ‘한국교회사 인물 80’을 연재합니다. 총 2회에 걸쳐 마련되는 이번 기획은 한국교회초기부터 현대까지 교회는 물론 사회, 문화, 예술 등 각 방면에서 뛰어난 업적과 활약으로 교회의 위상을 드높인 인물을 선정, 교회의 역사를 되짚어 보는 계기가 될 것입니다.
교회, 초석을 다지다
한국 교회의 시작은 16세기다. 마태오 리치 신부의 ‘천주실의’를 통해 시작된 교회 역사는 100여 년이 지나 남인학자인 권철신·일신 형제, 이벽과 정약전·약종·약용 삼형제 등에 의해 신앙운동으로 발전했다.
특히 이 시기에 교회 최초의 영세자인 이승훈으로 인해 교회의 역사는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이승훈은 이벽의 부탁으로 북경으로 가 40여일을 머물며 필담으로 교리를 배우고 1784년 베드로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귀국 후 이승훈은 김범우에게 세례를 줬다. 김범우는 자신의 집을 신자들의 집회소로 제공 ‘명례방 공동체’가 탄생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명례방 공동체’에는 이벽을 중심으로 이승훈, 권철신 형제, 정약전 삼형제 등이 참여했다.
박해의 시작
1791년 전라도 진산군의 선비 윤지충은 모친상을 당한 후 천주교식으로 제례를 지냈다. 이 사실이 중앙에 전해져 정조는 사회도덕을 문란하게 하고 무부무군(無父無君)의 사상을 신봉했다는 죄명을 씌워 사형에 처했다. 윤치충은 한국 교회 최초로 참수치명을 당했다. 권일신은 유배를 시켰다. 이것이 바로 최초의 천주교도 박해사건인 ‘신유박해’다.
한편 1795년 한국 최초의 신부인 주문모 신부가 조선에 입국했다. 그는 탄압을 피해 서울에서 숨어 지내며 전교 활동을 폈다. 이때 순교자이며 우리나라 최초의 여회장인 강완숙의 집에 피신했다. 정약종, 황사영을 만났고 왕실 여인들에게도 세례를 베푼 그는 1801년 자수해 새남터에서 순교했다.
권일신의 제자인 이존창은 충청도 내포 일대에 교리를 전파했다. 그는 신해박해 때 투옥되었다 석방 이후 활발한 전교활동을 펼쳐 내포의 사도로 불리기도 했다.
1801년은 신유박해가 일어난 시기이다. 이 시기는 천주교 세력이 급격히 늘어난 때이다. 제천 배론 산중으로 피신한 황사영은 ‘백서’를 작성했다. 여기에는 베이징 주교에게 조선 천주교의 박해 실상을 알리고 도움을 구하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백서’가 발각돼 황사영 역시 순교하고 박해가 한층 가혹해졌다. 이럼에도 불구하고 이순이·유중철 동정부부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지키며 순교했고 ‘상재상서’를 통해 유학자들이 가지고 있던 천주교에 대한 그릇된 생각들을 지적, 박해를 그칠 것을 주장한 정하상도 순교했다.
천주교에 대한 탄압이 더욱 심해지던 이때 1831년 파리외방전교회 브뤼기에르 주교가 조선교구의 제1대 주교로 선임됐다. 그는 대만과 싱가포르에서 포교활동을 하다 만주에서 많은 고초를 겪은 후 한국으로 들어오던 길에 만주?몽골 국경에서 병사했다.
계속되는 탄압속에서도 뿌리내린 천주교
박해가 한층 심해지는 가운데서도 한국 교회는 믿음의 끈을 놓지 않았다.
1836년 김대건 신부가 프랑스인 모방 신부에게 세례를 받았다. 이후 중국으로 가 신학을 비롯해 사제로서 배워야 할 덕목을 갖춘 그는 1845년 국경을 넘어 서울로 잠입했다. 프랑스외방전교회에 도움을 요청하고자 상하이로 건너간 김대건 신부는 금가항 신학교에서 한국 교회 최초로 사제 품을 받았다.
김대건 신부는 1846년 선교사의 입국과 선교부와의 연락을 위한 비밀항로 개설을 위하여 백령도 부근을 답사하다가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 26세로 순교했다.
한국교회의 두 번째 한국인 사제이자 ‘땀의 순교자’로 불리는 최양업 신부가 1849년 사제품을 받는다.
그는 신앙의 교육자 역할과 신앙의 토착화를 위해 일했으며 한국 교회 성장을 위해 헌신, 목자로서의 역할을 다했다.
외국 선교사들도 교회의 뿌리내림에 일조했다. 파리외방전교회 다블뤼 주교는 이러한 가운데도 왕궁까지 천주교를 전파했다.
그러나 흥선대원군이 1866년 병인박해를 일으키자 체포돼 죽임을 당했다.
천주교를 공인받으려고 대원군과 면담, 성공단계에까지 이르렀던 남종삼 역시 이때 새남터에서 순교했다.
근대화 교회의 모습
예수회 사학자 샤를르 달레는 천주교 역사의 초기를 쓴 ‘한국천주교회사’를 집필해 교회사 연구에 기틀을 마련했고 로베르 신부는 대구교구의 기초를 닦았다.
당시 제8대 조선교구장이었던 파리외방전교회 뮈텔 대주교의 역할이 무엇보다 빛났다. 그는 1886년 조불 수호 통상조약 체결 때 신교의 자유를 허용하는 항목을 넣는 데 이바지 하였으며 1906년 주간 ‘경향신문’과 ‘경향잡지’(경향신문의 ‘보감’이 전신)를 창간했다.
또 황사영백서와 박해시대 순교자 기록 등의 고문서를 수집해 ‘뮈텔 문서’를 만드는 등 한국에서 활동한 50년 동안 한국 교회의 토착화와 현대화에 공헌한 인물이었다.
당시 뮈텔 대주교의 권유로 교회일을 시작한 정남규는 뮈텔 대주교가 ‘황사영 백서’ 원본을 교황청으로 보내려 하자 백서를 필사, 현재 이는 절두산 순교 박물관에 보관돼 있다.
첫 여성 수도자가 탄생한 역사적인 시기이기도 했다. 박황월 수녀는 1888년 샬트르 성 바오로 수도회에 입회에 1898년 첫 서원을 해 한국 최초의 수녀가 되었다.
병인박해로 출판기초가 무너진 상태에서 활판인쇄기초작업을 시작한 최지혁의 공과도 빼놓을 수 없다. 그는 자신의 글씨체를 만들기도 했으며 사후 ‘한불자전’, ‘천주성교공과’ 등을 간행했다.
성서의 한글 번역 작업도 진행되었던 시기이다. 한기근 신부는 1909년 ‘사사성경’이 간행되는데 큰 역할을 했으며 출판물에 띄어쓰기가 보편화되지 않았던 상황에서 ‘우리말 띄어쓰기의 원칙’을 작성하는 등 국문학적으로 성과를 남겼다.
1911년 한국을 방문한 성 오틸리엔 수도원의 초대 원장 노르베르트 베버 아빠스는 1914년 독일에서 ‘조용한 아침의 나라에서’라는 여행기를 발간했다. 이는 민속학적 가치를 높이 평가받았으며 그는 겸재 정선 그림의 회화사적 가치를 발견한 최초의 인물이기도 하다.
1931년 전주가 감목대리구로 설정돼 김양홍 신부가 최초의 방인구교장이 되었으며 대구교구 초대 교구장 드망즈 주교는 한국 근대 교회의 기틀을
마련했다.
특히 1936년 드망즈 주교가 쓴 ‘드망즈 주교 일기’는 대구교구의 창설에서부터 초창기 27년간의 역사가 그대로 담겨 있어 대구대교구사를 서술하는데 1차 사료로 쓰이고 있다.
일제치하
서상돈은 교회사업과 자선사업, 애국운동에 앞장을 섰다. 특히 1906년 국채보상운동을 발의, 일본의 강압에 의해 빚진 1300만원을 근검절약으로 갚겠다는 애국운동을 펼쳤다.
부이용 신부는 일제치하에서 매괴학교를 바탕으로 애국 계몽 운동에 힘썼으며 드뇌 신부는 우리나라 최초의 보육원인 해성보육원의 기틀을 마련, 교육을 통해 복음을 전파하기도 했다.
한국의 모세, 한국의 사도 바오로라 불리는 안중근은 1909년 10월 26일 일본인으로 가장, 하얼빈 역에 잠입해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했다. 거사에 앞서 그가 총알에 십자가 표시를 새겨 넣고 성공을 위해 기도했다는 것, 감옥에서도 이토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성호를 그으며 “하느님 감사합니다”며 기도했다고 전해지는 것을 통해 그의 신앙관을 엿볼 수 있다.
6.25 사변 전후의 교회
다양한 분야에서 발전이 진행된 시기였다. 파리외방전교회 보댕 신부는 동성중고등학교의 교가를 작곡하는 등 교회 전례 음악에 있어 선구자적 업적을 남겼으며 피숑 신부는 김대건 신부의 라틴어 사한집 간행과 100여점에 이르는 귀중한 사진자료들을 수집해 한국 교회 연구에서 개척자적인 역할을 이루어냈다.
예수 성심 시녀회를 창시한 델랑드 신부는 1946년 성모자애원을 공식 설립해 1962년 대한민국 문화훈장, 1969년 프랑스 정부로부터 레지옹 도뇌르 프랑스 최고 훈장을 수상하기도 했다.
윤의병 신부는 최초의 군난 소설 ‘은화’를 집필하며 순교자와 공감하는 삶을 살아갈 것을 제시하였으며 1948년 제헌국회의원에 당선된 장면은 대통령 특사로 교황청을 방문하는 등 평생을 신앙과 사회생활을 모범적으로 접목시킨 신앙인의 참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메리놀 외방전교회 스위니 신부는 1924년 한국 선교사로 임명된 뒤 6.25 사변 후인 1955년 재입국해 ‘가톨릭 구라회’를 창설해 나병 치료의 구체적 기틀을 마련했다.
제11대 내무부 장관을 역임한 법조계 신앙인 백한성은 잡부금 문제 및 인사비리를 척결하는데 앞장서며 많은 동료 법조인들을 입교 시켰다.
한편 초대 평양지목구장이며 초대 주한 교황 사절인 메리놀 외방전교회 번 주교는 1949년 ‘한국 천주교 중앙위원회’(현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를 발족하는데 큰 기여를 했다. 그는 주교 문장 안에 한국을 상징하는 무궁화를 넣기도 했다.
◆안중근(토마스)
투철한 신앙 힘으로 독립운동
19세 때 빌렘 신부에게 영세…인재교육에도 남다른 열정
1879년 황해도 해주에서 안태훈의 3남1녀 중 맏아들로 태어난 안중근은 아버지의 영향으로 천주교 신앙을 갖게 됐다.
프랑스 파리외방전교회 빌렘 신부를 만나 교리를 받고 19살 때인 1896년 7월 황해도 안악군 매화동성당에서 세례를 받은 그는 1898년 4월 하순, 빌렘 신부가 청계동본당을 설립하자 교회 일에 투신했다.
당시 안의사는 빌렘 신부의 복사로 함께 공소를 방문하기도 하고, 비신자들에게 천주교를 안내하는 등 빌렘 신부의 선교활동을 도왔다. 1899년에는 청계동본당 총대(지금의 사무장직)에 추대돼 7년간 금광 감리사건 등 교회 안팎의 여러 문제를 해결하는 등 능력을 발휘하기도 했다.
안의사는 정약종의 ‘주교요지’ 등의 교리체계에 많은 영향을 받아 이를 신앙생활과 전교활동의 바탕으로 삼았다. 특히 그의 천주교 교리 설교는 깊이있는 동양철학적 이해를 바탕으로 한 접근으로 한국 교회사에서도 돋보이며, 그의 철저한 신앙관과 사생관(死生觀)을 엿보게 한다.
안의사는 빌렘 신부 밑에서 선교사로 활동하면서 교회의 앞날에 대해 많은 모색과 고민을 한 신앙인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는 빌렘 신부와 함께 뮈텔 주교를 만나 대학 설립을 요청하는 등 뮈텔 주교에게 여러 차례 대학 설립을 청원했으나 끝내 거절당하고 만다.
교육을 통해 나라를 구해야겠다는 안의사의 의지는 대단해서 1907년 집을 평안도의 진남포로 옮기고 사재를 털어 삼흥(三興)학교와 돈의(敦義)학교를 세우는 등 인재교육에도 남다른 공을 기울였다.
안중근 의사의 국권 회복을 위한 전략이 독립전쟁이라면, 그의 기초적 배경이 된 사상체계가 동양평화론이다. 안의사의 순국 100주년을 앞두고 새롭게 해석되고 있는 동양평화관과 이토 히로부미 저격에 이르는 독립운동 등은 모두 투철한 신앙의 힘이 바탕이 됐음을 보여준다.
◆한국교회 40명 인물 (이름/연대/업적)
1.권철신(權哲身, 암브로시오) / 1736~1801 / 순교자
2.김범우(金範禹, 토마스) / 1751~1787 / 한국 교회 첫 순교자
3.주문모 신부(周文謨, 야고보) / 1752~1801 / 한국 최초의 외국인 사제
4.이존창(李存昌, 루도비코) / 1752~1801 / 순교자
5.이벽(李檗, 세례자 요한 ) / 1754~1786 / 이승훈에게 세례, 전도부의 간부로 활약
6.이승훈(李承薰, 베드로) / 1756~1801 / 한국 교회 최초의 영세자
7.윤지충(尹持忠, 바오로) / 1759~1791 / 한국 교회 최초 참수치명
8.정약종(丁若鍾, 아우구스티노) / 1760~1801 / 한국 최초의 평신도 단체인 명도회의 초대회장, 순교자
9.강완숙(姜完淑, , 골롬바) / 1761~1801 / 우리나라 최초의 여회장, 순교자
10.정약용(丁若鏞, 요한) / 1762∼1836 / 18세기 조선을 대표하는 당대 최고의 학자, 순교자
11.황사영(黃嗣永, 알렉시오) / 1775~1801 / 황사영 백서 작성, 순교자
12.이순이(누갈다) / 1781~1801 / 동정부부, 순교자
13.브뤼기에르 주교(바르톨로메오) / 1792~1835 / 초대 조선교구장
14.정하상(丁夏祥, 바오로) / 1795∼1839 / 조선교구 설정의 직접적인 계기를 마련
15.최지혁(崔智爀, 요한) / 1808~1878 / 한국 교회 출판 문화의 선구자
16.남종삼(南鍾三, 요한) / 1817~1866/ 순교자
17.다블뤼 주교(안토니오) / 1818~1866 / 조선교구 5대 교구장
18.김대건(金大建, 안드레아) / 1821~1846 / 최초의 한국인 신부,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19.최양업 신부(崔良業, 토마스) / 1821~1861 / 두 번째 한국인 사제이자 땀의 순교자
20.샤를르 달레 / 1829~1879 / 한국천주교회사 집필
21.서상돈(徐相敦, 아우구스티노) / 1849~1913 / 교회사업, 자선사업, 애국운동에 앞장
22.로베르 신부 / 1853~1922 / 대구대교구의 기틀 닦음
23.뮈텔 대주교 / 1854~1933 / 제8대 조선대교구장, 뮈텔문서 기록, 한국 천주교회의 토착화와 현대화에 공헌
24.한기근 신부(韓基根, 바오로) / 1867/1868~1939 / 성서의 한글 번역 작업, 우리말 띄어쓰기의 원칙 작성
25.부이용 신부 / 1869~1947 / 일제 치하 애국 계몽 운동 힘씀
26.노르베르트 베버 아빠스 / 1870~1956 / 성 오틸리엔 수도원의 초대 원장, ‘조용한 아침의 나라에서’라는 제목의 여행기 발간, 겸재 정선 그림의 회화사적 가치를 발견한 최초의 인물
27.박황월(朴黃月,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 1872~1966 / 한국 최초의 수녀
28.드뇌 신부 / 1873~1947 / 인천 박문초등학교 설립, 우리나라 최초의 보육원인 해성보육원의 기틀 마련
29.김양홍 신부(金洋洪, 스테파노) / 1874~1945 / 최초의 방인구교장
30.드망즈 주교 / 1875~1938 / 대구교구 초대 교구장, 드망즈 주교 일기
31.안중근(安重根, 토마스) / 1879~1910 / 한국의 모세, 한국의 사도 바오로
32.보댕 신부 / 1886~1945 / 한국 교회 전례 음악의 선구자
33.정남규(鄭南奎, 요한)/ 1886~? / 황사영 백서 필사
34.번 주교(파트리치오) / 1888~1950 / 초대 평양지목구장, 초대 주한 교황 사절
35.피숑신부 / 1893~1945 / 한국 교회사 연구에서 선구자적이고 개척자적인 업적 남김
36.스위니 신부(요셉) / 1895~1966 / '학위 없는 나병 박사’라 불림, ‘가톨릭 구라회’ 창설
37.델랑드 신부 / 1895~1972 / 예수 성심 시녀회 창시자
38.윤의병 신부(尹義炳, 바오로) / 1889~? / 최초의 군난 소설 ‘은화’ 집필
39.장면(張勉, 요한) / 1899~1966 / 제2공화국 국무총리, 신앙과 사회생활을 모범적으로 접목시킨 투철한 신앙인
40.백한성(白漢成, 알로이시오 곤자가) / 1899~1971 / 법조계 신앙인. 제11대 내무부 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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