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 계신 곳 향해 오늘도 달립니다”
“어떤 것들은 좋은 ‘땅’에 떨어져 열매를 맺었는데… 좋은 ‘땅’에 뿌려진 씨는 이러한 사람이다. 그는 말씀을 듣고 깨닫는다. 그런 사람은 열매를 맺는데, 어떤 사람은 백 배, 어떤 사람은 예순 배, 어떤 사람은 서른 배를 낸다.”(마태 13, 8~23)
오후 6시. 이정원(체칠리아.50.수원교구 평촌본당)씨가 지난 20년 가까이 하루도 거르지 않는 습관을 기억해 내곤 자리에서 일어섰다. 비가 와도, 눈이 와도 한번도 거르지 않는 습관이다. 심지어는 손님이 찾아와도 “잠깐만 기다려 주세요. 제가 하루도 거르지 않고 하는 일이 있거든요”라며 양해를 구할 정도다.
이씨가 조금은 무거워 보이는 아령을 찾아 들었다. 그리고 자신의 나이 만큼 들었다 내렸다 했다. 그리고도 모자라 윗몸 일으키기를 한다. 오늘도 어김없이 100회다. 가뿐히 윗몸 일으키기를 마친 이씨가 이번에는 신발 끈을 단단히 조여 맨다. 집 밖을 나서는 이씨의 발걸음이 ‘통통’ 튄다. 인근 공원에 도착한 이씨가 몸 풀기(스트레칭)를 시작했다. 10분여의 몸 풀기를 마친 이씨의 눈매가 달라진다. 세태에 찌든 가슴을 씻으려는 듯 큰 숨을 들이킨다. 그리고…. “탁탁탁탁” 이씨는 ‘땅’위를 달리기 시작했다. 가볍다. 152㎝의 단신이 사뿐싸뿐 땅을 밀어낸다.
이씨는 42.195㎞에 ‘푹’빠져 산다. 수원가톨릭마라톤 동호회 회원인 이씨는 소문난 마라톤 광. 월·목·토·일요일은 인근 공원에서 가벼운 달리기를 하고 화요일은 언덕을 오르내리는 연습을 한다. 또 수·금요일은 인근 종합운동장 등을 찾아 인터벌 트레이닝을 한다.
오늘은 가벼운 달리기를 하는 날. 말이 가벼운 달리기지, 초보자가 보이기에는 엄두가 나지 않을 정도의 고강도 달리기다. 물론 처음에는 가볍게 뛴다. 그러더니 점차 속도를 낸다. 도대체 멈출 줄 모른다. 한참을 다리고 나서야, 시계를 보더니 보폭을 줄인다.
“처음 마라톤을 시작했을 때는 주위 사람들로 부터‘마라톤에 미쳤다’는 소리를 듣기도 했어요. 혼자서만 100살까지 살 작정이냐고 남편으로부터 핀잔도 들었어요. 하지만 멈출 수 없었습니다. 어쩔 수 있나요. 하면 할수록 신나고 좋은 걸.”
80년대 후반 부터 하루도 거르지 않고 달리기를 시작했으니까 벌써 20년 가까이 된다. 단순히 손발에 땀이 나지 않는 특이 체질을 개선해 보기 위해 시작한 달리기가 이제는 몸에 완전히 배었다. 달리다 보니 어느 덧 달리기에 좋은 몸이 만들어진 것이다.
“달릴 수 있는 몸을 주신 것, 그 자체에 늘 감사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이런 달리기 좋은 몸을 주셨는데 달리지 않고, 몸을 망친다면 그것 만큼 죄짓는 일도 없어요. 탈렌트를 활용하고 그 열매를 백배 이백배로 맺어야지요.”
그는 “마라톤은 정직한 운동”이라고 말한다. 노력한 만큼, 땀 흘린 만큼 열매를 맺기 때문이다. 이씨가 시계를 한번 쳐다 보더니, 또 다시 달린다. 약간의 고통 뒤…. 목 뒤로 땀이 촉촉이 젖는다. 행복하다.
“경기장에서 ‘달리기’하는 이들이 모두 달리지만 상을 받는 사람은 한 사람뿐이라는 것을 여러분은 모릅니까? 이와 같이 여러분도 상을 받을 수 있도록 달리십시오.”(1코린 9, 24)
“휴~”20여분을 달린 이씨가 시원한 숨을 토해낸다. 이마에 땀이 몇 방울 맺혀있다. 그런데 힘든 기색이 전혀 없다. 얼굴은 오히려 웃는다. 소질이 엿보인다. 실제로 최근 한 마라톤 대회에 참여했는데, 한 전문가로부터 “10대라면 선수로 키우고 싶을 정도로 소질이 있다”는 칭찬을 듣기도 했다. 그만큼 수상 경력도 화려하다. 1995년 일본 일관시 단축 마라톤 대회 여성부 3위, 1999년 생활체육 달리기 대회 여성부 1위, 2003년 안양시 마라톤 대회 1위 수상 등 메달을 셀 수 조차 없다. 메달과 트로피 보관을 제대로 할 수 없을 정도다. 쟁쟁한 사람들만 나온다는 2001년 조선일보 춘천 마라톤 대회 10㎞ 부분에서도 5위를 차지했다.
42.195㎞ ‘마라톤 풀코스 최고 기록’이 3시간 33분. 웬만한 남자 마라톤 마니아도 혀를 내두르는 기록이다. 게다가 이 기록도 30대나 40대 초반이 아닌, 2003년 46세 나이로 달성한 기록이다. 풀코스의 절반인 ‘하프 최고 기록’은 1시간 36분. 이뿐 아니다. 각종 산악 마라톤 대회에서부터 63빌딩 수직 마라톤에 이르기까지 도전하지 않은 분야가 없다. 1년에 참가하는 마라톤 대회만 40여회. 평소에 꾸준한 운동을 하고, ‘준비’를 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항상 준비된 몸을 만들어야 합니다. 항상 깨어 준비하고 있어야 달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욕심은 금물이다. “남자 마라톤 마니아 중에 간혹 욕심을 부리며 달리다가 부상을 당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무리를 하면 탈이 납니다. 몸에 맞게 달려야 합니다. 마라톤은 욕심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예요. 마음을 겸손하게 비우고, 그저 목적지를 향해 꾸준히 달려야 합니다.”
내리막 길이 달리기 쉽다고 속도를 내서는 안된다. 체력을 안배해야 한다. 내리막 길 후에는 오르막 길이 어김없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땅은 그만큼 거짓이 없다.
슬펐던 일? 워낙 낙천적인 성격인 탓에 고민은 별로 하지 않는다. “아무리 어려운 일이 있어도 걱정하지 않아요. 다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인데….”라는 식이다. IMF 당시 남편이 실직을 했을 때도 오히려 주위에서 걱정을 더 많이 했다. 지금은 남편 사업도 정상 괘도에 올랐다. 군대간 아들이 보고 싶어 허전한 것 빼고는 별다른 어려움이 없다. 기쁜 일? 특별히 기쁜 일이 없어도 매일 매일 감사하고 기쁘게 산다. 아무리 힘든 일도 기쁘게 하면 모두 잘 풀린다고 한다. 마라톤도 기쁘게 했더니 기록이 쑥쑥 오른다.
“너무 많이 쉬었네요.” 이씨가 또 다시 ‘땅’위를 내닫기 시작했다. 막 떠나려는 이씨를 붙잡고 ‘달리면서 무슨 기도를 하느냐’고 물었다.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도록 힘을 주세요.”
오직 그것 뿐이다. 이씨는 오늘도 결승점을 향해 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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