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 고난의 역사’를 가슴에 품고…
1927년 ‘평양지목구’ 지정
‘평신자대회’ ‘강습회’ 개최
평신도 양성, 전교에 힘쏟아
“일요일. 10시경에, 10리 떨어진 유은택(留恩澤)으로 출발했다. 그곳은 한천처럼 신입 교우들로 이루어진 공소이다. 학교에서 환영식이 있었고, 강당에서 리셉션이 있었다. 이어 즉시 견진 예정자 94명을 포함한 161명의 고해자들에게 고해성사를 주기 시작했다. 오후에는 견진자들만을 찰고하였는데, 그것만으로도 이미 일이 아주 충분했다.”
1891년 평양에 첫 성당 생겨
제8대 조선교구장 뮈텔 주교가 1907년 평안도 지역을 사목방문하던 중 11월 3일 평안남도 평원군 한천면의 유은택이란 조그만 마을 공소에 머물며 남긴 일기에는 당시 신자들의 열심한 신앙이 엿보인다.
처음으로 자신들의 공소를 방문한 주교님을 대한 신자들은 환영식과 리셉션을 마련하는 등 지극 정성으로 맞았을 터다. 그런 가운데서도 뮈텔 주교는 오후 내내 견진자들을 찰고하느라 여념이 없을 정도로 바쁘게 보낸다.
본당도 아닌 공소에서 160명이 넘는 신자들이 고해성사를 볼 정도였다면 유은택 공소의 규모나 활발했을 평신도들의 신앙생활을 짐작할 수 있다.
이제는 까마득히 잊혀진 땅이 되어버린 평안도 지역에 처음으로 본당이 설립된 것은 1891년 한국에 들어온 파리 외방전교회 르 장드르(1866~1928) 신부가 1896년 봄 평양본당 주임으로 부임하면서였다.
그로부터 4년 후인 1900년 평양 시내 관후리에 새 성당을 건립함으로써 평안도 전교에 새로운 이정표가 세워지게 된다.
1927년 3월 17일 평안도 지역이 서울대목구로부터 분리돼 평양지목구로 신설되면서 북녘 교회는 한국교회사에 새로운 역사를 써내려 가게 된다. 당시 평양지목구는 교황청으로부터 평안도 지역 포교권을 위임받은 메리놀 외방전교회 신부 15명으로 시작됐다.
여러 가지 어려움 속에서도 메리놀회 선교사들은 평신도 양성에 남다른 노력을 기울였다. 1933년 9월 제1회 평양지목구 전교회장 강습회를 시작한 것을 비롯해 이듬해 8월에는 한국 교회에서는 처음으로 제1회 평양지목구 평신자 대회를 여는 등 평신도를 통한 교회 발전에 기초를 놓았다.
또한 문서 전교에도 적극적으로 나서 1934년부터 잡지 ‘가톨릭 연구’(나중에 이름이 ‘가톨릭조선’으로 바뀜)를 발행해 전교와 가톨릭 사상 보급을 위해 애쓰는가 하면, 1935년 10월에는 ‘한국 천주교 전래 150주년 및 순교자들의 시복 10주년’을 기념하는 전국 신앙대회를 평양에서 개최하는 등 가톨릭 운동에 힘을 기울였다. 특히 일제의 끈질긴 탄압에도 불구하고 신사참배와 황성요배 요구를 거부하는 등 겨레와 함께 호흡한 ‘민족교회’로서의 면모를 구축해오게 된다.
이런 노력에 힘입어 지목구 설립 이전인 1923년 당시 7개 본당에 4800명에 불과하던 신자는 1934년에는 1만3063명을 헤아리기에 이르렀다.
수난 겪는 평양교구
1937년 일어난 중일 전쟁은 다시 한번 평양교구 역사에 커다란 질곡으로 다가왔다. 이듬해인 1938년 2월부터 일제의 교회에 대한 탄압은 더욱 노골화됐고 1941년 12월 8일 태평양전쟁이 터지자 메리놀회 회원들이 연금되고 강제 소환되는 등 수난이 이어졌다. 급기야 1942년 6월 1일 전 메리놀회 신부들이 강제 추방당하고 1944년에는 일제에 의해 주교좌 관후리성당과 부속 건물마저 징발당하고 말았다.
일본의 패망으로 종교의 자유가 찾아오는 듯 싶었지만 공산 정권이 들어서면서 더욱 어둔 길을 걷게 된다. 광복 후 관후리성당을 되찾아 1948년 말에는 성당 건축 사업을 거의 마무리했지만 공산 정권에 몰수당하고, 1949년 5월 평양대목구장 홍용호 주교가 납치돼 행방불명되는 사건이 발생해 교회는 최대의 시련에 직면하게 된다.
앞에 놓인 길이 확연히 눈에 보이는 것이었음에도 평양교구 소속 신부들은 하나같이 양떼를 버리지 않고 남아 스스로 죽음의 길을 택함으로써 평양교구는 지금까지 민족 고난의 역사를 고스란히 함께 하는 교회로 아로새겨져 있다.
이후 40년 가까이 침묵의 교회로 남아 있던 평양교구가 다시 모습을 드러낸 것은 1988년 6월 조선천주교인협회가 결성되고 그 해 10월 평양에 장충성당이 세워지면서였다.
하지만 1950년 당시 본당 14곳에 신자수 2만8000여명의 저력을 간직하고 있던 평양교구가 지금 어떤 모습으로 이어져 오고 있는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평양교구장 대리 황인국 몬시뇰은 “민족이 다시 하나되는 날 눈물겹게 신앙을 지켜왔을 형제들을 잊지 않고 있었다는 말을 할 수 있도록 깨어 있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너희는 여기에 남아서 나와 함께 깨어 있어라”(마태 26, 38)는 예수님의 말씀이 더욱 아프게 다가오는 것은 잊고 지내온 북녘 형제에 대한 미안함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인터뷰] 평양교구장 대리 황인국 몬시뇰
“나의 주님을 눈물겹게 지켰죠”
“앞에 놓인 길이 어떤 길인지 뻔히 알면서도 양떼들을 지키기 위해 자신들의 길을 묵묵히 걸어가신 분들을 생각하면….”
평양교구 설정 80주년을 맞은 황인국 몬시뇰의 심정은 이루 말로 표현하기 힘들다. 지난 2004년 6월 평양교구장 대리로 임명된 후 누구 못지 않게 평양교구 재건을 위한 노력을 기울여 오고 있는 그이지만 한 구비 한 구비를 넘을 때마다 벅차다는 느낌을 지워내기 힘들다.
황 몬시뇰이 지닌 고민의 이면에는 ‘침묵의 교회’로서 뿐만 아니라 ‘잊혀져 가고 있는 교회’인 평양교구의 현재가 가로놓여 있다. 평양교구 출신으로 현직에서 활동하고 있는 사제도 현재 8명에 지나지 않아 이들마저 은퇴하고 나면 교구 재건을 위한 발걸음은 기약하기 힘든 실정이다.
이런 어려움들을 무릅쓰고 다시 일어서게 하는 힘은 바로 원체험으로 남은 어릴 적 기억들이다. 1936년 평양시 하수구리에서 태어난 자란 황 몬시뇰의 집에서 주교좌 관후리성당은 지척이었다.
거의 매일 새벽미사 복사를 서며 가까이서 지켜봐온 사제와 수도자들의 모습은 훗날 성소의 길을 택하게 한 원동력이 됐다. 하나둘 납치돼 행방불명이 되는 신부들을 지키기 위해 낮에는 할머니들이, 밤에는 청년들이 숙직을 서던 모습도 어린 마음에 깊숙이 새겨졌다.
일제에 빼앗겼다 되찾은 관후리성당을 다시 지을 때의 기억은 당장 어제의 일처럼 생생하게 떠오른다. 평양 시내 신자들뿐 아니라 평안도 전역에서 신자들이 찾아와 성당 건축 현장 인근에 가건물을 지어놓고 며칠씩 머물며 성당 짓는 일에 너나 할 것 없이 나서던 모습은 비신자들에게도 감동을 줘 입교자가 생길 정도였다.
평양 시내에 있던 3개 본당의 신부들이 모두 잡혀가자 언제 마지막 고해성사가 될 지 모른다는 마음으로 서포까지 30리길을 걸어가 고해성사를 보고 미사를 드리던 기억은 쉬 지워지지 않는 기억들 가운데 하나다. 고해성사를 보기 위해 성당을 찾아오는 신자들이 하도 많아 점심때가 한참 지나 미사를 봉헌하기도 했다.
“누구보다도 눈물겹게 신앙을 지키고 주님을 위해 목숨을 바치고자 했던 우리의 한 부분이 흘러간 역사로만 남고 잊혀져가는 현실이 안타깝습니다.”
황 몬시뇰은 사랑은 관심에서 비롯된다는 평범한 진리를 되뇌었다.
“통일이 될 미래의 어느 날 북녘 땅 어디에선가 신앙을 지키며 살아온 형제를 만나게 될 때 부끄럽지 않은 손을 내밀 수 있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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