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박해 불구 ‘신앙의 꽃’ 피워
16세기 신앙전파… ‘금교령’… 긴 잠복기
교세 0.3%로 낮지만 사회사목 열의 높아
다도(茶道)와 온천의 나라 일본. 아시아 경제 강국이지만 전통과 역사가 잘 보전되어 있는 나라다.
우리나라와는 지리상으로 가까운 것만큼 역사 안에서도 서로에게 밀접한 영향을 주고 받아왔다. 특히 36년간 일제 강점기를 지내며 우리에게 지울 수 없는 아픔과 슬픔을 준 나라이기도 하다. 지금까지도 독도와 ‘동해’표시, 위안부 등의 문제들이 끊임없이 불거져 나오고 있다.
하지만 몇 천 년의 관계가 악연으로만 계속된 것은 아니다. 2002년에는 한·일 월드컵을 공동 개최했고 문화적 경제적 교류를 지속해 오고 있다.
양국의 가톨릭교회도 마찬가지다. 1990년대 후반부터 ‘한일 주교 교류 모임’과 ‘한일 청년 교류 모임’ 등을 통해 친밀한 관계를 만들어 왔다.
역사 속에서 대립과 협력을 반복해왔던 일본. 가까이 있지만 우리가 알지 못했던, 쉽게 알 수 없었던 일본교회의 모든 것을 5주에 걸쳐 알아본다.
일본 천주교의 역사
일본교회는 한국교회보다 200년 앞선다. 예수회 선교사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신부가 1549년 가고시마(鹿兒島)에 첫발을 내딛으면서 일본교회의 역사가 시작됐다.
하비에르 신부는 2년 반 동안 일본에 머물며 히라도, 교토, 야마구찌, 후나이 등 규슈와 혼슈 서부 지역에서 선교활동을 펼쳤다.
일본교회는 하비에르 신부를 비롯해 코스메 도 토레스 신부, 바르타자르 고가 신부, 일본인 전도사 루이스 드 알메이다 등에 의해서 전성기를 맞이한다. 각 지방 다이묘(지주)의 후원으로 1580년대에는 신자수가 약 10만 명 정도까지 늘어났다.
하지만 주님의 나라를 향한 발걸음이 결코 쉽지만은 않았다. 전국 통일을 꾀하던 도요토미 히데요시(1537~1598)가 ‘금교령’을 내리면서 첫 번째 박해가 시작됐다. 당시 긴키와 나가사키 지방에 분포되어 있던 수도원과 병원은 물론 신학교 등은 모두 몰수되고 교회는 거의 파괴됐다. 뿐만 아니다. 금교령에도 불구하고 선교활동을 펼쳐 왔던 성직자와 신자 등 26명이 교토에서 체포됐다. 이들은 귀를 잘리고 온갖 조롱과 돌팔매질을 당한 후, 오사카를 거쳐 나가사키까지 800km의 ‘죽음의 길’을 걸어야 했다. 26명의 순교자들은 1862년 교황 비오 9세에 의해 시성됐다.
도요토미가 병사한 후 가톨릭 신자가 다시 늘어났고, 평온한 시대가 찾아오는 듯했다. 그러나 그 뒤를 이어 도쿠가와 이에야스(1543~1616)가 전국적으로 그리스도교 금교령을 내렸다. 이후 250여 년 간 피비린내 나는 박해가 지속된다. 사료에 의하면 1620년에만 4000여 명의 그리스도인이 순교했다고 한다. 살아남은 신자들은 섬이나 산 속으로 숨어 들어가 자신들의 신앙을 지켜갔다.
에도 막부의 처절한 억압 끝에 1644년 마지막 사제가 순교한 후부터 일본교회의 신자들은 오랜 기간 동안 자신들의 신앙을 숨기며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1865년 나가사키 오오우라 천주당이 생기고, 숨어있던 그리스도인들이 나타나면서(잠복 기리스탄 발견) 일본교회의 역사가 다시 시작됐다.
일본교회의 오늘
박해는 1889년 메이지 막부가 신앙의 자유를 허가하면서 끝난다. 교회는 본격적으로 선교활동을 펼치기 시작했지만 오랜 박해를 겪은 일본신자들은 외부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 종교를 잘 드러내지 않았다. 신자들은 지금까지도 여전히 개인 신앙 활동에 치중하고 있다. 때문에 일본 인구 중 가톨릭신자가 차지하는 비율은 매우 낮다. 2005년 말 교세통계에 따르면 신자 비율은 0.3%에 그치고 있다.
일본교회에는 또 다른 큰 문제가 있다. 사회적으로도 문제가 되고 있는 저출산 문제가 그것. 이러한 저출산 문제는 결국 교회 내 성소자 부족 현상을 초래하고 있다.
한 성직자는 “성당은 물론 거리에서도 어린 아이들을 보는 것이 쉽지 않다”고 말했다. 교회는 유아신자의 감소가 곧 청년신자의 부재로 이어져 문제 해결을 위한 다양한 시도를 하고 있다.
이와 더불어 늘어나고 있는 이주노동자들에 대한 사목적 대안이 절실히 필요한 시점이다. 특히 가톨릭 국가인 남미 출신 노동자들이 증가하고 있어 일부 성당에서는 이미 스페인, 포르투갈, 영어 등 다양한 언어로 미사를 봉헌하고 있다.
하지만 외국어가 가능한 사제들이 부족할 뿐만 아니라 적은 수의 사제들이 본당사목, 이주노동자 사목, 사회복지 등을 관할하면서 일손이 모자란 실정이다.
그러나 아직 희망의 불씨는 꺼지지 않았다. 최근 젊은층으로부터 가톨릭식의 결혼식이 각광을 받고 있다. 일본도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결혼 전 교리교육은 필수다. 때문에 젊은이들은 자연스럽게 가톨릭과 교리를 접하게 된다.
나고야교구 오따신부는 “젊은이들의 가톨릭식 결혼은 가톨릭이라는 종교에 대한 이해를 넓히는 기회”라며 “미래를 향해 한발 한발 내딛는 교회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일본 천주교회 현황(2005년 현재)
▲인구 수 : 1억2686만9397명
▲교구 수 : 3개 대교구 포함 총 16개
▲신자 수 : 44만4505명. 인구의 약 0.3%
▲사제 수 : 1550여 명
▲수도자 수 : 수사 206명, 수녀 6293명
▲신학생 수 : 220여 명
▲연간 세례자 및 견진자 수 : 세례자 7000여 명, 견진자 5000여 명
▲성인 : 26명
▲성당 : 801개
▲교회운영 교육시설 : 870개(유치원,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 등)
▲교회운영 사회사업시설 : 병원 35개/ 아동복지시설 229개/ 노인복지시설 188개/ 기타 105개
“보편교회 소명 실천 평신도 양성에 최선”
◎일본 주교회의 의장 노무라 쥰이찌 주교
“일본교회는 일본인만을 위한 교회가 아닙니다. 일본 안의 모든 이들이 함께하는 교회입니다.”
일본 주교회의 의장 노무라 쥰이찌(野村 純一) 주교는 가톨릭교회가 단어의 의미 그대로 보편성을 지닌 모든 이를 위한 교회라고 정의를 내렸다.
그가 보편교회를 강조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최근 이주노동자들이 늘어남에 따라 그들을 위한 사목이 주관심사이기 때문이다.
“많은 이주노동자들이 일자리를 찾아 일본으로 오고 있습니다. 교회는 그들을 위한 사목을 준비해야 할 필요가 있지요. 하지만 그들을 돕기 위한 성직자나 봉사자 등의 일손이 턱없이 부족한 게 사실입니다.”
이와 함께 청년신자의 부재에 대한 언급도 잊지 않았다. 그는 개인주의가 팽배한 일본 청년들이 다른 이들과 함께 어울려 신앙생활을 하기 보다는 홀로 성당에서 기도하고 미사에 참례한다고 설명했다.
“청년들이 또래 신자들을 만나고 그 안에서 하느님을 발견하게 되길 바랍니다. 그래서 전국에 퍼져있는 청년들의 네트워크를 형성할 계획을 세우고 있습니다.”
그는 청년신자를 인도하는 일과 이주노동자를 위한 사목활동 등 교회의 모든 일에 평신도들이 활발하게 움직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많지 않은 성직자와 수도자가 전체를 이끄는 일이 쉽지 않을 뿐만 아니라 교회의 중심이 평신도라는 것. 그는 앞으로 종신부제와 봉사자들을 양성하기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신앙이 무엇인지를 깨닫는 일입니다. 경제성장 속에서 영혼의 공허함을 느끼는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은총을 알리는 일은 우리 교회와 신자들의 몫입니다.”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