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화 강풍… 소외계층 바람막이 돼야”
외국산 농산물로 식탁 차려지고 국제결혼증가 이민자 비중 커져
교회, FTA가 낳는 문제점 인식, 농민·이주노동자 등 관심 가져야
# 2037. 4. 15(수) 8:37
윤승환(가명.37)씨는 아내의 성화에 못 이겨 근근이 눈을 떴다. 어제도 행사 뒷정리를 하느라 늦은데다 동료들과 한잔하는 바람에 열두시가 훨씬 넘어서야 들어왔다. 하나뿐인 딸 현주(10)는 벌써 학교에 갔는지 눈에 띄지 않고 아내는 아침을 차리느라 분주하다. 콩나물국을 끓이는지 다진 마늘 냄새가 머릿속을 흔들어 깨웠지만 속은 영 내키지 않는다.
“오늘은 좀 늦어도 된다고 했잖아….”
투정부리듯 한 마디 뱉고 식탁에 앉은 그의 표정이 영 마뜩찮다.
‘저 고추는 중국산인 것 같은데…. 농약깨나 쳤겠군. 두부는 어느 나라 콩으로 만든 거지. 어, 저 샐러드는…, 지금 철이 아닌데.’ 젓가락을 들고 머뭇거리고 있는 그를 보고 아내의 핀잔이 날아온다. “또, 또…. 그 콩나물 집에서 기른 거야.”
윤씨는 요리사다. 그것도 남들이 부러워하는 일급호텔 요리사다. 매사에 이런 눈일 수밖에 없는 그는 자신의 직업이 싫을 때도 있다. 건강을 일차적으로 책임진다는 자부심을 가지라는 동료나 주위의 말도 듣기 좋은 소리로 들릴 뿐이다.
하는 일에 회의가 들거나 짜증이 날 때면 그는 어김없이 아버지를 떠올린다. 윤씨의 아버지는 속초에서 식당을 운영했었다. 선선한 바람이 불 때면 내놓는 아버지표 생태탕이나 싱싱한 해산물을 듬뿍 넣어 만든 해산물 짬뽕은 근동에서는 물론 멀리서도 일부러 찾는 이들이 있을 정도로 인기가 있었다. 아버지의 손맛을 잊지 못한 단골이 멀리서 찾아오는 날이면 아버지는 흥에 겨워 손님들과 소주잔을 기울이기도 하셨다. 윤씨는 어린 마음에도 그런 아버지가 자랑스러웠다. 손맛도 손맛이지만 식재료가 좋아야 한다고 강조하던 아버지는 좋은 재료를 얻기 위해 채소밭을 따로 가꾸셨다. 새벽바람을 맞으며 어시장을 누빌 때는 활기에 넘치는 공판장 분위기가 그리 좋을 수가 없었다.
꼭 30년 전 이맘때쯤 윤씨의 뇌리에 새겨진 기억이다. 한·미 FTA에 이어 한·중, 한·유럽연합(EU) FTA가 잇달아 체결되면서 아버지는 식당을 접어야 했다. 밀려드는 외국 농수산물을 쓰지 않고 버티는데 한계가 있었던 데다 근처에 식당만 수십 곳이 입주한 빌딩이 들어섰던 것이다. “이제 내 몫도 끝난 모양이다.” 기운 빠진 아버지의 목소리가 지금도 쟁쟁하다.
# 2037. 4. 19(일)
“아빠, 늦겠어.”
오늘따라 현주가 보챈다. 국제학교에 다니는 현주네 반이 야외 현장학습을 가는 날이다. 이번엔 부모 동반 프로그램이어서 바쁜 일요일인데도 억지로 시간을 냈다. 이번 행사 때문에 며칠 전부터 온 가족이 일기예보에 신경을 곤두세웠다. 요즘은 농사 때문에 날씨를 걱정하는 일은 거의 없다. 오늘처럼 나들이가 있을 때나 옷차림이나 세차 문제 때문에 귀를 기울일 뿐이다.
부모가 함께 하는 이런 행사 때는 외국인도 더러 끼어 있어서 세상이 좁다는 것을 실감한다. 어릴 때만 하더라도 국제학교라고 하면 손으로 꼽을 정도였지만 이제는 이런 데라도 보내지 않으면 낙오자로 찍히는 분위기다. 유치원 다닐 때부터 원어민 교사가 집중적으로 영어교육을 시키기 때문에 현주도 외국인과 웬만한 대화는 나눌 수 있을 정도다. 굳이 유학을 보내지 않아도 되겠다 싶어 입학은 시켰지만 교육비가 장난이 아니다. 하지만 더 심각한 문제는 교과 과정에 있다. 아예 우리나라 역사나 전통을 배울 수 있는 과목이 없다시피 하다. 그래서 텔레비전을 보다가도 현주가 “아빠, 고구려가 뭐야?”라는 식의 물음을 던져올 때 울컥 뭔가가 치밀어 오르기도 한다.
“여보, 계속 그 학교 보내야겠어?” “유학도 많이 보내고 명문대도 많이 들어간다잖아요.”
‘자식 위해서’라는 말에 슬그머니 말끝을 흐리게 되지만 이 나라가 어디로 가는지 걱정이다. 영화를 보려고 해도 온통 다른 나라 영화들뿐이다.
TV 채널이 수백 개나 되지만 ‘미드’(미국드라마)처럼 물 건너온 프로그램이 대부분이다. 우리나라에서 만들어졌다고 해도 출연진은 물론 연출자 가운데 상당수가 외국인들이어서 어느 나라 얘기를 하고 있는지 헷갈릴 때다 많다.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서랍을 열자 진통제도 비타민도 온통 수입해온 약병만 눈에 띈다.
“병 주고 약 주는군.”
# 2037. 4. 22(수). 19:00
D지역 소공동체에 또 한명의 식구가 늘었다. 칠레에서 온 뽈리까르뽀 우루따도(35)씨다. 농산물 수출 상담 차 6년 전에도 우리나라를 방문한 적이 있다는 그는 이번에 한국지사로 발령을 받아 가족이 모두 한국에 왔다. 한국 여성과 결혼해 살고 있는 브라질 출신의 나드손(34)씨와 금방 친해져서 다행이다. 소공동체 모임에 참여하는 14명 가운데 6명이 이리저리 국제결혼가정이어서 외국 문화가 낯설지 않다.
이번 소공동체 모임에서는 지난 2028년 3월 박안드레아씨와 결혼해 베트남에서 온 뜨란티 티엄(32)씨 가정을 돕는 문제로 오랜 시간 얘기를 나눴다. 박씨가 갑작스런 사고로 선종하면서 티엄씨는 아홉살 난 지성이와 이제 갓 두 돌을 넘긴 지연이를 혼자 책임져야 하는 입장이다. 정부에서 시행하고 있는 정착 지원 프로그램과 본당에서 마련한 다문화가정을 위한 사목 덕분에 한국 사회에 잘 적응하고 있는 편이지만 당장 혼자서 어려움을 헤쳐 나가기엔 역부족이라는 결론이 났다. 의견을 모은 결과 우선 지역에 있는 ‘이민가정지원센터’를 통해 일자리를 주선해 주기로 하고 본당에도 건의해 영적인 도움을 줄 수 있는 방안을 찾기로 했다. 윤씨네도 가끔씩 티엄씨 집을 방문하기로 했다.
# 2007. 4. 한국 교회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타결로 신자들의 일상은 물론 교회의 사목 지형 전반에 적잖은 변화가 예상되고 있다.
이주사목 분야에서는 이미 변화가 가시권에 들어있다. 국제결혼이 꾸준히 늘어나면서 다양한 사목적 요청과 노력이 이어지고 있다.
대법원이 4월 15일 국제결혼.이혼 건수를 분석해 내놓은 결과에 따르면 지난해 전체 결혼 33만7528건 가운데 국제결혼이 11.6%인 3만9071건으로 나타났다. 신혼부부 8쌍 중 1쌍꼴로 배우자 한쪽이 외국인이었다. 1990년 100쌍 중 1쌍에 불과하던 비율이 15년 사이에 10배 이상 증가한 것이다.
‘국제 이혼’도 해마다 늘고 있다. 2003년에 2784건이던 것이 2004년 3315건, 2005년 4208건으로 매년 30∼40%씩 늘어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지난해에는 외국인 배우자와 이혼한 건수가 6187건으로 전체 이혼 12만5937건의 4.9%를 차지했다.
이에 따라 교회의 사목적 대응도 다양화되고 있다. 이주민들에 대한 상담과 지원 활동을 펼쳐온 서울대교구 노동사목위원회는 3년 전부터 한국인과 국제 결혼한 여성 및 외국인 이주노동자 자녀들을 돌보는 보육시설을 마련해 운영해오고 있으며, 지난 3월에는 지방자치단체와 함께 ‘결혼이민자가족지원센터’를 열어 ▲결혼이민자들의 고충해결 ▲한국어 교육 ▲자녀교육 지원 등 이민자들에게 한발 더 다가서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국제결혼 비중이 높은 전주교구를 비롯해 이주노동자가 많은 수원교구 등도 ▲장학금 지원 ▲한국어교실 운영 지원 ▲공부방 운영 ▲가족 초청 행사 ▲피정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통해 국제결혼 가정의 영성적인 목마름을 채우고 공동체성을 키워나가기 위한 노력을 기울여 오고 있다.
서울대교구 노동사목위원장 허윤진 신부는 “국제간 교류 확대와 이로 인한 사목 지형의 변화는 어쩔 수 없는 시대 조류가 되고 있다”면서 “변화의 폭과 흐름을 정확히 예측하고 적절히 대응하려는 노력을 기울이는 가운데 작은 이들의 목소리가 묻히지 않도록 힘써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나아가 이주민이 향후 교회 성장과 발전에 일익을 담당하게 될 것이라는 인식을 바탕으로 이주사목의 토대를 강화하기 위한 사목자들의 협력과 신자들을 대상으로 한 교육이 선행돼야 할 것으로 보인다. 세계 자유무역체제의 확대로 가장 큰 피해를 입은 농촌과 농민 사목 영역에서도 적잖은 변화가 예상된다. 특히 농민 수 감소율이 농업생산액 감소율보다 훨씬 더 높아 농업·농촌 자체가 초토화될 가능성도 없지 않아 ‘적절하고도 과감한 대책’이 요청되고 있다.
한국가톨릭농민회 정재돈 회장은 “전통적 농업 생산만 생각할 게 아니라 농촌의 범위를 확대해 생산뿐 아니라 가공, 휴양, 문화 등을 아우를 수 있는 범위의 경제를 생각해야 한다”면서 “대량 생산과 소비, 대량 폐기로 이어지는 현대인의 삶을 극복하는 삶의 양식과 문화라는 측면에서 농촌을 새롭게 인식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지금까지 한국 교회는 이주민과 농민 등 가난한 이들을 위한 사목과 관련해 사전 ‘예방적 접근’ 보다는 사후 ‘치료적 접근’의 모습을 보여왔다. 당장 가시화되고 있지는 않지만 자유무역체제의 강화로 인해 나타날 수 있는 문제점들을 인식하고 적절한 사목적 비전을 제시하려는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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