섭리로 이끌어주신 감사와 인고의 세월
오로지 하느님 나라 영광 위해 헌신
1972년 보좌주교 임명…1986년 교구장 착좌
교구 시노드 개최…한일주교 교류모임 주도
북 ‘라선병원’ 개원, 남북화해에도 크게 기여
소공동체·대리구 정착…24일 이임 감사미사
“무한한 영광입니다. 아버지로서 더욱 조심스러워집니다.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주교가 교구장으로서 목자생활을 더욱 충실히 해내어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나고 우리 교구가 복되고 발전하는 교구가 되길 빌뿐입니다.”
1986년 한솔 이효상 선생이 대구 가톨릭 저널리스트 클럽 회보인 ‘창백(創白) 제18호에 아들 이문희 대주교의 대구대교구장 착좌를 맞아 인터뷰 한 내용의 일부다.
그로부터 21년이 흐른 2007년 4월 24일 이문희 대주교는 전 교구민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교구장 이임 감사미사를 봉헌하고 교구장직에서 물러난다.
아버지 한솔 선생의 간절한 바람대로 이대주교는 자신의 모든 삶을 교구와 한국교회 발전에 바쳤다.
고등학교 시절, 친구 좋아하고 놀기 좋아하는 ‘개구쟁이’였던 이대주교는 1957년 경북대 정치학과를 졸업하고 사제의 길을 가기 위해 프랑스로 유학을 떠났다. 1962년 프랑스 리옹 신학대학 철학과를 졸업한 이대주교는 1965년 12월 23일 파리에서 사제품을 받았다.
이대주교는 1986년 가톨릭신문과의 인터뷰를 통해 사제의 길로 들어선 계기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원래 나는 대학을 들어갈 때 정치가가 되려고 했어요.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정치나 경제 등은 누구나 할 수 있고 할 사람도 많은데, 인간들을 하느님과 가까이 있게 해서 우리의 정신 세계를 풍요롭게 하는 신부님이 되려는 사람은 드문 것 같아 사제가 되기로 결심했어요.”
이대주교는 사제품을 받은지 7년만인 1972년 10월 7일 당시 38세의 나이로 대구대교구 보좌주교에 임명됐다. 젊은 나이에 보좌주교로 서품돼 무거운 십자가를 져야 했던 이대주교는 14년간 보좌주교로서 묵묵히 교구장을 보필하며 대구대교구 발전의 초석을 다졌다. 이대주교는 당시 교구장 서정길 대주교를 보좌하며 1979년 12월 대구가톨릭대학병원을 개원했으며, 1982년 대구가톨릭대학교(당시 선목신학대학) 개교, 신나무골 성지, 한티 성지 개발 등을 성사시켰다.
그리고 14년후인 1986년 7월 5일 서정길 대주교에 이어 대구대교구 제8대 교구장에 착좌했다. 당시 교구장 이·취임은 교구장의 75세 정년을 권고하던 새 교회법에 따른 것으로 교구장 선종이나 공석을 보충하는 것이 아니라 교구장 재임 중 이임과 승계가 이뤄진 한국교회의 첫번째 역사적인 일이었다.
이대주교의 교구장 착좌 당시 대구대교구 신자수는 20만명. 현재 45만명인 것을 감안하면 외형적으로 괄목할만한 성장을 이루었다. 교구의 내적 쇄신과 발전을 위한 이대주교의 노력은 더욱 두드러진다.
‘함께 가자 생명의 길로’란 슬로건을 내걸고 열린 교구 1차 시노드는 1997년 11월 30일 개막미사를 시작으로 막이 올라 1999년 10월 10일 폐막식을 가지며 2년여의 대장정이 마무리 됐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2천년 대희년 준비를 시작했던 교회의 섭리적인 사건이었다면, 한국 천주교회 선교 200주년은 대구대교구가 시노드를 준비하는 계기가 됐다.
이대주교는 당시 200주년 기념 사목회의가 열렸지만 부족함과 아쉬움이 있어 교구 시노드를 개최키로 결심했다. 대구대교구는 시노드 기간동안 3차례의 총회와 지속적인 분과별, 지구별 회의 등을 거쳐 35개 제안을 표결하고 4가지 결의문을 채택했다. 성직자, 수도자, 청소년, 신앙교육(주일학교), 예비신자, 본당상, 사회복지, 가정 등 7개분과에서 논의되고 결의된 내용을 바탕으로 1996년 10월 26쪽에 이르는 방대한 양의 교구장 교서를 발표했다. 이대주교는 교구 1차 시노드를 통해 새로운 시대에 부응하며 쇄신된 교회로 거듭나는 토대를 마련했다.
이대주교는 교구장 교서에서 “우리 모두가 스스로 신앙을 생활하며 사랑으로 공동체를 이루고 생명의 길을 그리스도와 함께 가야 한다는 것”이라며 “생명의 길로 우리가 함께 가기 위해서는 언제나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야 할 따름”이라고 말했다.
지난해까지 12차례 진행된 한일주교단 교류모임도 이대주교가 일궈낸 성과중 하나다. 1996년 2월 일본 동경에서 한일 양국 주교단이 동일한 역사인식이 필요하다는데 인식을 같이하고 공동 역사 교재 편찬을 목적으로 회합을 가지면서 시작된 이 교류모임은 이대주교가 처음부터 주관해왔다. ‘아픔의 역사’를 넘어 한일 주교단이 함께 화해와 용서의 모범을 보였다는 점에 이 모임의 진정한 의미를 둘 수 있다.
2005년 8월 5일 함경북도 라선시 연주동에서는 라선국제가톨릭병원 개원식이 열렸다. 첫 초석을 놓은지 10년만의 결실로 남북간의 화해와 일치를 향한 새로운 이정표가 마련되는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이러한 새로운 역사가 만들어지는데 이대주교가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1995년 당시 서울대교구장 김수환 추기경과 이문희 대주교, 전 수원교구장 고(故) 김남수 주교는 북한 나진선봉지역이 경제특구로 지정된다는 소식을 접하고 한국교회 차원의 도움을 검토하던 중 병원 건립을 추진하게 됐다. 당시만 해도 한국교회가 북한을 지원할 수 있는 경로가 거의 전무했다는 점에서 의미있는 선택이었다.
이대주교는 교구장 재임 중 교구민들이 하느님의 말씀을 따라 친교와 믿음의 공동체를 이루고, 사제들이 보다 신자들과 함께 호흡하며 살 수 있는 길을 제시했다. 이를 위해 소공동체 모임 활성화와 대리구 체제 정착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이러한 이대주교의 확고한 방침과 노력으로 교구 안에서 매주 복음나누기를 실시하는 본당들이 점차 늘어가고 있으며, 현재 5개 대리구는 주교대리 신부를 중심으로 사목국장, 가정·청년·청소년 담당 사제들이 각 지역의 복음화와 발전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
이대주교는 그동안 저서 ‘밝은 날이 다가온다고 누가 알려줍니까’ ‘사랑으로 부르는 평화의 노래’와 역서 ‘복음과 폭력과 평화’ ‘이 어린이와 같이 되지 않으면’ ‘삶, 죽음, 부활’ 등의 책을 펴냈다. 이 중 반핵 반전을 외치며 세계평화를 위해 헌신한 나가이 다카시(바오로) 박사의 생애를 엮은 ‘사랑으로 부르는 평화의 노래’는 이땅에 진정한 화해와 평화의 메시지를 전했다.
이대주교는 한국교회 ‘큰 어른’으로서 나라나 정치, 국민이 잘못가고 있는 부분에 대해 담화나 메시지를 통해 성찰과 각성을 촉구하기도 했다.
1997년 12월 5일 한국사회가 경제난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을 당시 특별담화를 발표, “지금 우리 사회는 경제사정의 악화로 빚에 시달리고 실업으로 좌절되고 고통받는 국민이 되어 암담한 마음을 안고 있다”며 “이 경제적 난국을 극복하기 위해 신자 여러분의 동참과 협력을 당부한다”고 말했다. 2000년 대림절을 앞두고 발표한 담화에서는 “대기업이 도산되고 수 조원의 빚만 남기고 사라지며 신문에 매일같이 하는 구조조정은 아직도 끝없이 해야 한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을 뿐, 정치는 정당들의 소아병적인 고질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면서 “우리 모두가 제자리를 찾고 최소한의 본분을 확인하고 수행하는 일에 힘쓰는 것이 무엇보다 우선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한 올해 신년 메시지에서는 “정치인과 정당은 물론 국민 모두가 마음을 비우고 살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라며 “내가 제일이라는 속단을 하지 않을 수 있도록 조용한 마음을 가지고 참으로 자기보다는 남을 위해 사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당부했다.
이대주교는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란 자신의 사목표어처럼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질 수 있도록 사목자로서의 모든 열정을 다 쏟았다.
교구장 재임 21년, 주교로 산 35년의 삶은 하느님의 말씀과 영광을 드러내는 삶이었다. 2011년 교구설정 100주년을 4년 앞둔 지금, 이대주교는 후임 교구장 최영수 대주교에게 ‘무거운 십자가’를 승계했다. 최대주교가 이대주교의 사목방침을 계승 발전시키며 모든 사제단·교구민들과 함께 교구 발전의 새로운 이정표를 마련해나갈 것으로 기대한다.
사진설명
▶1972년 11월 30일 대구 계산성당에서 거행된 이대주교의 보좌주교 서품식 모습.
▶1986년 7월 5일 이문희 대주교가 제8대 대구대교구장에 착좌하고 있다.
▶이대주교의 교구장 착좌식에 참석한 가족들. 맨 앞 왼쪽이 아버지 이효상 전 국회의장, 오른쪽이 어머니 한덕희 여사.
▶이문희 대주교(맨 오른쪽)와 윤광선 당시 가톨릭신문사 편집위원(왼쪽에서 세번째) 등이 좌담회를 갖고 있다.
▶1996년 5월 18일 모교인 대구 초등학교 일일 명예교사로 나선 이문희 대주교가 강의에 앞서 어린이들과 악수를 하고 있다.
▶2006년 4월 부처님 오신날 축하 인사차 팔공산 동화사를 방문한 이대주교가 당시 주지 지성 스님으로부터 염주를 선물받고 있다.
▶2006년 11월 대구대교구 한티 피정의 집에서 열린 제12회 한일주교 교류모임.
▶라선국제가톨릭병원 개원에 중추적 역할을 담당했던 이문희 대주교, 고 김남수 주교, 김수환 추기경, 노트켈 볼프 수석 아빠스(앞줄 오른쪽부터).
▶2001년 2월 27일 성 김대건 기념관에서 거행된 최영수 보좌주교 서품식에서 이대주교가 안수를 하고 있다.
▶1997년 11월 30일 대구 계산성당 문화관 강당에서 열린 이대주교의 주교서품 은경축 축하연.
▶1997년 12월 17일 가톨릭신문사 제정 제1회 가톨릭학술상 시상식에서 이대주교가 가톨릭대학교 고전라틴어연구소를 대신해 장덕필 신부에게 시상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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