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고 있니? 더불어 사는 행복함을…
20년 전, 4월의 봄날. 과거 시간의 나열로 글을 시작하는 것은 꽤나 진부한 시도다. 그러나 ‘기차길옆 작은학교’ 가족들이 맞이한 20년이라는 숫자는 우리가 잊고 지낸 혹은 외면해온 생의 아름다움을 떠올려주기에 첫머리에 언급해본다.
만석동은 쌀이 많이 모이는 곳이라는 뜻과 달리 피난민들이 하나둘씩 모여 이룬 가난한 동네다. 베스트셀러였던 소설 덕분에 ‘괭이부리말’이라고 하면 더 잘 알아들을 지 모르겠다. 이곳에선 한 장의 판자지붕 아래 서너 가구가 복작댔다. 지지리 가난했다.
꼭 20년 전, 이 마을에 청년 서넛이 들어왔다. 그들은 해진 옷을 입은 깡마른 아이들의 손을 잡고 뛰놀았다. 흙탕물에서 뛰어놀던 아이들과 책을 읽고 노래를 불렀다. 아이들은 청년들을 ‘이모 삼촌’이라고 불렀다.
‘기차길옆 작은학교’는 이모 삼촌들이 마련한 공부방이다. 공부방 이모 삼촌들은 좋은 대학에 진학하고, 많은 월급을 받고, 큰 아파트로 이사하는 것만이 성공한 삶이라는 것을 가르치진 않았다. 만석동 아이들 한사람 한사람이 자신들이 얼마나 아름다운 존재인지, 얼마나 소중한 생명인지 깨닫기만을 빈다. 이모 삼촌 스스로 ‘나누는 삶 더불어 사는 삶’을 살면서 아이들도 하느님 보시기에 좋은 모습으로 커가길 바란다.
하느님 나라를 살고픈 ‘꿈’을 꾼다
『우리들은 본당 청년회 등에서 만난 선후배였습니다. 맨처음 우리는 아가방을 마련했습니다. 그런데 네 살, 일곱 살짜리 동생을 데리고 오는 10살 어린이가 자기들도 다닐 수 있는 공부방이 있었으면 좋겠다더군요. 당장 공부방을 열었습니다. 삐걱대는 좁다란 판자방이었지만 아이들은 신이 났지요.
공부방은 아이들만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어머니교실도 아버지모임도, 마을주민들을 위한 경제공동체도 이곳에서 만들었습니다. 요쿠르트 수레에 책을 싣고 골목마다 누비며 책을 빌려주던 때가 정말 엊그제 같은데요….
90년도부터 아이들과 공연을 시작했습니다. 지난 4월 15일에는 인천학생교육문화회관의 멋진 공연장에서 20주년 기념 공연을 펼쳤습니다. ‘길.동무.꿈’이 우리의 공연 주제입니다.
공연에는 공부방 가족들이 한사람도 빠짐없이 참여합니다. 한목소리로 세상을 향해 우리가 키워가는 꿈을 이야기합니다. 우리의 삶을 드러내며 소통합니다. 다행히 우리들의 목소리에 응답하는 희망의 메아리들이 여전히 울립니다.
그러나 요즘 부모님들은 예전과 달리 공부방에 큰 관심이 없습니다. 아예 못가게 하는 부모님들도 생겨났습니다. 자식들이 이모 삼촌들처럼 가난하게 살까봐 걱정되시는 모양입니다. 지금 중고등학생들은 모두 자신들의 선택에 의해 공부방을 찾습니다.
물론 서울 강남에서 “뽀다구나게 살고 싶다”는 아이들도 있습니다. 공부방에서는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라는 것을 머리로는 알지만, 정작 학교에만 가거나 다른 마을 친구들만 만나도 온갖 유혹에 시달립니다. 그래도 최근에는 이라크 어린이들이 전쟁으로 얼마나 고통 받는 지, 이웃의 외국인노동자들이 어떻게 힘겨운 하루하루를 보내는 지에 관심이 더 많습니다.
이 작은 학교는 지금까지도 마음 따스한 후원인들의 도움으로 어렵사리 운영되고 있습니다. 상근하는 이모 삼촌들의 생활비는 직장다니는 이모 삼촌들의 월급을 모아 나눕니다. 가난하지만 나누는 기쁨에, 더불어 사는 행복에 발목잡힌 덕분이지요.
미약한 존재라고 소중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놀라운 속도로 변화하는 세상이라고 돈이 최고는 아닙니다. 우리에겐 오로지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치는 삶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를 살고자하는 ‘꿈’이 있습니다. 뜬구름 잡는 소리라는 분들도 계셔서 사실 이런 이야기들을 잘 하지 않았습니다. 봉사도 정도가 있지, 다 내어주고 어떻게 사냐고 하시는 분들도 있습니다. 기특하다며 칭찬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우린 봉사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만석동 아이들과 나누는 삶은 자연스러운 하루하루 일상입니다. 죽어있는 교리는 싫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기에 사는 삶입니다.』
가난의 ‘섬’… 행복여행은 계속된다
‘기차길옆 작은학교’가 있는 동네에는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여전히 찌그러진 판자집이 즐비하다. 만석동 일대는 90년대 들어 주거환경개선지구로 지정됐다. 다닥다닥 붙은 판자집들이 헐리고 다세대 주택들과 고층아파트가 우후죽순 들어섰지만, 그 한가운데는 판자집촌이다. 주민들이 ‘섬’이라고 부르는 그곳에는 여전히 가난에 찌든 사람들이 있다. ‘아직도 이런 집이 남아있구나’하는 한숨이 절로 나올 만큼 낡고 어둑한 집 속에.
이 ‘섬’도 조만간 아파트나 공원으로 밀려버릴지 모른다. 공부방 이모 삼촌들은 만석동에서 떠밀려나면 트럭에 인형과 악기를 싣고 도시 변두리 지하방이나, 들녘과 바닷가의 가난한 사람들을 찾아 떠날 작정이다. 가난하지만 평화와 행복을 나누는 이모 삼촌들의 여행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오늘, 20년간 만석동의 꿈을 키워온 ‘기차길옆 작은학교(gichagil.saramdl.net)’에서는 44명의 아이들과 33명의 이모삼촌들이 북적대고 있다.
사진설명
▶‘기차길옆 작은학교’ 학생들과 이모들이 만석동 동네 어귀에 벚꽃맞이를 나갔다가 렌즈 앞에 함께 섰다.
▶1990년 셋방살이를 청산하고 처음 얻은 판자집.
▶1998년 공부방의 첫 성탄잔치.
▶지난 성목요일, 학생들이 이모 삼촌들의 발을 씻고 있다.
▶동네언덕길에서 본 만석동. 20년 전과 거의 변화가 없다.
기사입력일 : 2007-0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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