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에 뼈를 묻는 심정으로 이들과 함께살며 기도하죠”
시에라리온 우광호 기자
아프리카 야영 마지막 날인 5일째. 아침일찍 가바카(Kabaka) 마을을 출발한 이상원 신부와 일행은 해질 무렵 가라톤(Karathon) 마을에 들어섰다.
왜 열심히 일하지 않을까?
이 마을에도 역시 비누, 휴지, 칫솔, 치약이 없다. 당연히 화장실도, 욕실도 없다. 벌써 5일째 제대로 씻지 못했다. 걸어 가다가 냇물이 나타나면 얼굴을 씻고, 급한 용무는 산속에서 해결해야 했다. 이신부는 그런 야영생활에 익숙한 듯 아무런 불편을 느끼지 않는 듯했다. “오랜만에 한국사람 만나 함께 공소 방문하는 것이 이렇게 기쁘고 행복할 수 없습니다. 매번 저 혼자 오거든요.”
가라톤 마을에서도 큰 환대를 받았다. 원주민들이 저녁으로 닭 요리를 내왔다. 귀한 손님인 ‘얼굴색 하얀 추장’이 왔다며 내온 음식이다. 원숭이, 두더지 고기 등 입맛에 맞지 않는 음식으로만 5일을 생활한 탓인지 닭요리가 반갑게 느껴졌다. 먹음직스러웠다.
그런데 음식이 목에 넘어가지 않았다. 주위에 아이들이 빙 둘러서 구경을 하는 탓이다. 아이들은 대부분 영양가 없는 음식으로 배를 채워, 배가 불룩하게 나와 있었다. 몇 숟가락 들다가 수저를 놓자, 아이들이 달려들어 뼈에 묻은 작은 살점까지 쏙쏙 발라 먹는다.
처음에는 ‘아프리카 사람들도 열심히 일하면 잘 살 수 있을텐데…. 왜 열심히 일하지 않는 것일까’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생각은 순전히 ‘한국식’ 생각이었다.
농사는 땅콩과 콩, 그리고 원주민들이 가사바(Gasaba)라고 부르는 고구마가 전부. 게다가 땅도 척박하다. 농기구도 거의 없다. 원주민들은 날도 없는 곡괭이와 삽으로 밭을 일구고 살아간다. 먹는 것이 없으니 장시간 노동을 하기 힘들다. 더위와 체력의 한계 때문에 일을 하지 못하는 것이다.
해외원조 끊기고 “희망 없어”
부족장 오스만 콘테(Osman konteh, 42)가 앞으로 나섰다. “10년 내전 기간동안 마을 사람들이 모두 흩어졌습니다. 다시 모여 살게 된 것이 얼마 되지 않습니다. 어른이 된 이들은 전쟁 중에 학교가 없어서 학교에 다니지 못했고, 이제는 자녀들을 돈이 없어 학교에 보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2001년 종전 직후 약 3년 동안은 세계 각국의 구호물자로 어느 정도 살 수 있었지만 이제는 그나마 원조도 끊어진 상태입니다. 희망이 없습니다.”
마을 아이들은 모두 40여 명. 이중 10여 명만 20km밖에 떨어진 초등학교에 다닌다. 그나마 초등학교 과정이 전부다. 돈이 없어 중등교육은 꿈도 꾸지 못한다. 여학생들은 대부분 임신과 생계 때문에 초등학교 과정도 못 마치고 중도에 학업을 포기한다. 실제로 가라톤 마을에선 10대 대부분이 임신 중이었다.
“한국에는 여자들이 더 공부를 열심히하고, 또 잘한다고 들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는 정반대입니다.” 상급학교 진학시험을 치면 여자 아이들은 대부분 탈락한다. 육아와 농사일 등으로 공부할 시간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이신부가 마을 사람들에게 질문했다. “혹시 공부하고 싶은 사람 있으십니까.” 40대에서 10대까지 마을 주민 대부분이 손을 들었다.
이신부가 가장 고민하는 것도 이 부분. “평생동안 교육도 받지 못한 채 폭행과 강요된 노동에 시달리는 아이들이 많습니다. 집 한 채에 7만원 정도면 지을 수 있습니다. 앞으로 여자 아이들을 위한 집을 짓고, 공동체를 만들어 교육을 시키는 방안을 생각 중입니다.”
열악한 환경에서 아이들을 격리시켜 미래를 열어주겠다는 구상이다.
문제는 재원. 이신부가 현재 수도원으로부터 받는 활동비는 월 5만원. 이 돈으로 그 엄청난 수의 아이들을 교육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현재로서는 지켜볼 수 밖에 없는 상황. 현실적으로 필요한 학교 건립과 우물 공사 등은 아예 생각도 못하고 있다.
이신부가 마을사람들에게 말했다.
“저는 돈도 없고, 여러분을 도울 능력도 없습니다. 그저 이 곳에 뼈를 묻는다는 심정으로 여러분과 함께 기도하며 살아갈 뿐입니다. 여러분 힘들게 살아가는 것 다 알고 있습니다. 조금만 참고 열심히 일합시다. 그래도 어려운 일이 있으면 하느님께 의지합시다.”
전깃불 없는 캄캄한 암흑 속에서 원주민들이 ‘아멘’이라고 응답했다.
동료 선교사의 죽음
이튿날 새벽, 마을을 떠나 5시간을 걷고 다시 1시간 동안 차를 타서 이신부 숙소로 돌아왔다. 슬픈 소식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신부가 공소 방문을 나간 직후 한 동료 선교사가 선종했다는 것. 이신부는 여장도 풀지 않고 바로 1시간 동안 차를 몰아 교구 성직자 묘지로 향했다.
‘이발도 카술라’(Ivaldo Casula). 향년 62세. 이탈리아인이다. 30년 넘게 시에라리온에서 선교활동 해온 베테랑 선교사도 말라리아 앞에선 무기력했다. 무덤에는 묘비도 없다. 꽃 두 다발이 전부다.
남 일이 아니다. 말라리아, 장티푸스, 황열병, 식중독…. 목숨을 담보로 하는 선교. 이신부도 언제 어떻게 하느님 곁으로 갈지 모른다. 이신부가 봉분을 만지며 굵은 돌을 골라냈다 그리고 기도를 했다. 이신부는 한참동안 그렇게 서 있었다.
얼마나 흘렀을까. 기도를 마친 이신부가 기자에게 말했다.
“이제 가시면, 한동안 또 한국말은 잊고 살겠네요. 찾아오는 한국 사람도 물론 없겠죠. 한국에서 이곳…. 참 멀지요….”
이신부는 한참동안 무덤을 바라봤다.
이상원 신부 선교 후원
신한은행 110-077-255287 예금주 이상원 신부
문의 02-778-7671 취재팀
사진설명
▶이상원 신부가 미사 후 가바카(Kabaka) 마을 주민들과 함께 했다. 원주민들은 평소에 거의 옷을 입지 않고 지내다가 이신부가 마을을 방문하면, 가장 아끼는 옷을 입어 존경의 뜻을 표한다. 백맹종(사진가)
▶이상원 신부가 4월 초 말라리아로 선종한 이탈리아 선교사 ‘이발도 카술라’ 신부의 무덤 앞에서 기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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