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형제도 폐지되는 그 날을 향해…
⊙…지난 2002년과 2005년에 이어 세 번째로 한국을 찾은 헬렌 프리진 수녀는 한국이 올해로 ‘실질적 사형폐지국(Abolitionist in practice)’ 대열에 들어선다는 소식을 듣고 자신의 일처럼 기뻐했다. 5월 23일 오후 인천공항을 통해 입국한 헬렌 수녀는 곧장 서울 명동 로얄호텔에 마련된 기자 간담회장을 찾아 생명운동에 대한 놀라운 열정을 쏟아냈다.
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 사형제도폐지소위원회 위원 등과 함께 한 이 자리에서 프리진 수녀는 “사형제도는 한 사회에 있어 윤리적 주변 문제가 아니라 깊숙한 내부 문제”라고 강조하고 “연극 영화 등 예술을 통한 사형폐지운동은 대중들이 새로운 상상력을 얻고 대안을 고민할 수 있게 하는 효과적 수단”이라며 사형폐지운동에 대한 조언도 아끼지 않았다.
⊙…첫 강연이 열린 5월 24일 대전교구 탄방동성당에는 휴일임에도 신자들과 지역 주민 등 1000명이 넘는 이들이 자리를 가득 메워 프리진 수녀의 방문에 쏠린 관심을 보여주었다. 이 자리에는 연쇄살인범 유영철에 노모(당시 85)와 부인(60), 4대독자 아들(35)을 잃은 고정원(루치아노.65)씨가 참석해 눈길. 프리진 수녀의 소개로 청중 앞에 나선 고씨는 “유영철은 죽은 아들과 동갑내기이며 그의 자녀들은 제 외손녀들과 비슷한 또래”라며 “유영철을 용서함으로써 지금은 죽음보다 더한 고통에서 벗어나 평화를 얻게 되었다. 이 모든 것이 주님의 뜻이 아니면 안 될 일이었을 것”이라고 밝혀 박수를 받았다.
⊙…프리진 수녀는 25일 낮 대구에서 전 대구대교구장 이문희 대주교와 조환길 주교를 비롯한 대구가톨릭학술원 관계자들과 오찬을 함께 하며 사형제도에 관해 의견을 나눴다.
이날 만남에서 조주교는 “한국 교회는 교구 차원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사형수를 비롯한 재소자들의 교화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면서 “재소자들뿐만 아니라 다시 사회로 나가는 출소자들이 제대로 사회에 적응하도록 돕는 일에도 많은 정성을 쏟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에 프리진 수녀는 “한국에서 지난 10년 동안 사형집행이 이뤄지지 않은 것은 한국 교회의 노력과 헌신 덕분으로 복음을 삶에서 구체적으로 실천한 모범적인 사례”라고 말했다.
⊙…이에 앞서 프리진 수녀는 대구 경북지역의 대표적 사찰인 동화사를 방문, 주지 허운 스님을 만나 환담을 나눴다. 특히 이날 만남은 부처님 오신 날 이튿날 이뤄져 의미를 더했다. 프리진 수녀는 이 자리에서 “불교에서도 생명 존중의 가르침을 많은 이들에게 널리 전파하며 생명의 소중함을 일깨우고 있다는 사실을 전해 듣고 불교의 가르침에 큰 감동을 받았다”고 말했다.
#헬렌 수녀 특별강연 요지
“살인자 용서하고 구명한 피해자 가족은 참 영웅”
“제 아들이 저 친구의 아들을 죽였습니다.”
6년 전인 1999년 미국 콜로라도 주 컬럼바인 고등학교에서 일어난 총기난사 사건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가해자를 비롯한 15명이 희생된 이 사건 후 콜로라도 주의 주도인 덴버에서 강의를 마치고 사인회를 하다 아주 오랜 친구인 듯한 두 남자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 중 한 남자의 입에서 나온 이 말로 저는 예수님의 복음이 이 땅에 실현되고 있음을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도저히 화해할 수 없을 것처럼 보이는 이들이 이처럼 화해하고 친구가 된다는 것은 어떤 이들에게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일 것입니다.
영화화돼 여러분도 잘 아시는 ‘데드 맨 워킹(Dead Man Walking)’의 실제 모델이 된 사형수 패트릭 소니어가 형장에서 이슬로 사라지기까지 영적 조언자 역할을 한 2년6개월간의 시간은 제 소명을 자각하게 된 여정이었습니다.
소니어에게 자신의 외아들을 잃은 아버지의 모습은 진정한 신자의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는 엄청난 고통 속에서도 오히려 가해자와 가해자로 인해 고통을 당할 가해자 가족들과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도 기도하는 용서의 모습을 보여주었던 것입니다.
그 아버지는 “살인자를 증오하는 것이 나의 마음까지도 죽이는 것임을 깨달았다. 용서를 통해 자신마저 죽이고 있던 증오를 벗어날 수 있었다”고 말했습니다.
당시까지는 주로 사형수들을 도와왔기 때문에 피해자를 만난다는 건 생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아버지와의 만남을 통해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사랑이란 미움에 종속되지 않고 용서하는 것이란 점을 확신하게 됐습니다.
미국에서는 의미있는 변화가 일고 있습니다. 지난 1976년 미국에서 사형제도가 부활한 이후 지난 30년간 1000명이 넘게 사형을 당했으며 이 가운데 400건이 텍사스 주에서 이뤄졌습니다. 하지만 근래 들어 사형 선고가 점점 줄어들고 있을 뿐 아니라 정치권에서도 사형 집행을 피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습니다.
이 변화는 피해자 가족에게서 시작된 것입니다. 피해자 가족들이 정치권에 다가가 사형제도가 결코 자신들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 것임을 밝히고 정치가들을 설득함으로써 완고하기만 하던 많은 영역에서 새로운 움직임이 이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이들이 참다운 영웅이라고 생각합니다.
지난 2000년 이후 일리노이 주에서는 사형 선고를 받았다가 풀려나는 이들이 많이 생겨나고 있습니다. 법률 전문가도 아닌 대학생들이 사형수에 대한 새로운 증거를 발견해냄으로써 일어나고 있는 변화입니다. 이는 소외된 이에 대한 관심과 사랑이 얼마나 큰일을 해낼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 대학생들은 사형이란 돌이킬 수 없는 일 앞에 놓인 한 생명뿐 아니라 그들을 둘러싼 한 세상을 구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완벽하게 여기던 자신들의 제도가 지닌 문제를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가톨릭 신자가 되는 아름다움은 생명에 중심을 두기 때문입니다. 아기를 낳는 여성을 비롯해 어린이, 병자의 생명도 모두 주님이 주신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습니다. 따라서 사회에서 버려진 사형수들의 생명도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고 확신합니다.
사진설명
▶5월 24일 대전 탄방동성당에서 열린 헬렌 수녀의 강연은 휴일임에도 불구하고 신자들과 지역주민 등 1000여 명이 참석해 성황을 이뤘다.
▶헬렌 수녀(사진 왼쪽)가 연쇄살인범 유영철에 의해 노모와 부인, 4대 독자 아들을 잃은 고정원(사진 오른쪽)씨를 격려하며 악수를 하고 있다.
▶5월 25일 대구 동화사를 방문한 헬렌 수녀가 허운 주지 스님과 사형제도에 관해 의견을 나누고 있다.
▶대전교구장 유흥식 주교와 인사를 나누고 있는 헬렌 수녀.
▶25일 전 대구대교구장 이문희 대주교와 조환길 주교를 비롯한 대구가톨릭학술원 회원들과 오찬을 한 후 기념촬영.
▶헬렌 수녀가 5월 23일 기자회견장에서 조성애 수녀(사진 왼쪽)와 손을 들어 보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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