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5일 별세한 금아 피천득 선생… “순수한 삶 프란치스코 성인 닮아”
“
1930년 신동아 통해 등단
‘인연’ 등 수필 다수 집필
15년 전 영세 늦깍이 신자
주님의 기도 가장 좋아해
”
아흔이 훌쩍 넘은 나이에도 언제나 어린아이 같은 순수함을 지니고 있던 금아(琴兒) 피천득(프란치스코 97) 선생이 지난 25일 이 세상과의 인연을 마치고 주님 품으로 돌아갔다.
그의 삶은 자신의 작품처럼 순박하고 검소했다. 그는 평생 담배와 술을 하지 않고 산책과 클래식 음악 감상을 즐겼으며, 25년을 거주한 서울 반포동 낡은 아파트에 화려한 장신구 하나 두지 않았다.
# 수필가의 삶
금아는 제일고보(현 경기고)에 들어가면서 문학의 길에 입문했다. 춘원 이광수와의 인연이 시작되는 곳도 그곳이다. 춘원은 그의 재능을 알아보고 중국 유학을 권했을 뿐 아니라 거문고 소년이라는 ‘금아’라는 아호까지 지어줬다.
춘원의 권유에 따라 중국 유학길에 오른 금아는 후장대를 졸업 후 1930년 월간 ‘신동아’에 발표한 ‘서정소곡’으로 등단했다. 이후 문예지와 일간지 등에 장르를 불문하고 다양한 작품을 발표했다.
특히 열일곱이 되던 해부터 세 차례 만난 일본 소녀 아사코와의 만남과 이별을 다룬 ‘인연’을 대표작으로 일상의 이야기를 풀어가는 수필을 통해 평범함 속 아름다움을 표현하며 자신의 재능을 꽃 피웠다.
저서 ‘수필’에서도 “수필은 청자(靑瓷) 연적이다. 수필은 난(蘭)이요, 학(鶴)이요, 청초하고 몸맵시 날렵한 여인”이라며 남다른 애정을 나타내기도 했다.
20여 년 전부터는 “더 이상 산문을 쓰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나이가 들면서 글에 욕심이 들어간다는 것이 이유였다. 간간히 시와 동화집을 선보였고 지난해에는 대표작 16편을 수록한 ‘피천득 수필집’을 일본어판으로 번역 출간하며 창작생활을 이어갔다.
그는 막내 딸 서영(61)씨를 향한 사랑을 여러 작품을 통해 표현했다. 수필 ‘서영이’에서는 “서영이는 나의 엄마가 하느님께 부탁하여 보내주신 귀한 선물이다. 서영이는 나의 딸이요. 나와 뜻이 맞는 친구다 또 내가 가장 존경하는 여성이다”라고 밝힌 바 있다. 그는 1955년 딸에게 선물한 인형 ‘난영’을 지금까지 간직하며 씻기고 재우는 등 딸에 대한 사랑을 대신해왔다.
# 금아와 신앙
“이해인 수녀가 22살부터 찾아와 세례를 받게 하려고 애쓴 걸 김태관 신부님이 해내셨지.”
금아가 영세를 받은 것은 15년 전이다. 고(古) 김태관 신부(예수회)와의 인연으로 가톨릭 신자가 되었다. 성실한 신자는 아니라고 솔직히 밝히면서 “성탄, 부활에는 꼭 명동성당에서 미사를 드리고 가끔씩 명동성당을 찾을 뿐”이라며 소박한 웃음을 보인 그였다.
“제가 믿는 바는 하늘에 군림하시는 전지전능하신 신이기보다는 불쌍한 우리들 속에서 고뇌를 같이하시고 우리의 상처에 향유를 발라주시는 인간적인 예수입니다.”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라는 구절에서 인간미가 느껴진다며 주님의 기도를 가장 좋아하는 금아였다.
그는 또 서재 벽에 주보성인인 성 프란치스코의 상본 여러 장을 붙여놓고 그의 삶을 닮으려고 노력했다. 그래서일까? 금아의 생애 역시 성 프란치스코처럼 자연과 인간을 사랑하며 순진하고 욕심 없는 소년의 모습 그대로였다.
금아 피천득 선생은 평소 가족과 지인들에게 사후의 작은 바람을 말한 적이 있다.
“죽어서 천당에 가더라도 별 할 말이 없을 것 같아. 억울할 것도 없고…. 신기한 것 아름다운 것을 볼 때마다 살아있다는 것이 참 고맙고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훗날 내 글을 읽는 사람들이 ‘이 사람, 사랑을 하고 갔구나’하고 한숨지어 주기를 바라는 게 욕심이라면 욕심이죠.”
언제나 해맑은 미소를 머금고 소년과 같은 모습으로 살아간 금아는 자신이 태어난 5월 29일 장례를 치르고 우리의 곁을 떠났다.
■ 피천득 선생 약력
△세례명 프란치스코
△1910년 5월 29일 서울 청진동 출생 △1923년 서울 제일고보(현 경기고) 입학 △1929년 상하이 호강대학교 예과 입학 △1930년 ‘신동아’에 시 ‘서정소곡’ ‘소곡’ ‘파이프’ 등 발표 △1945~46년 경성대 예과교수 △1946~74년 서울대 사범대 교수 △1974년 문예 월간지 수필문학에 ‘인연’ 발표
△저서
소설 ‘은전 한 닢’, 평론 ‘노산시조집을 읽고’(32), 시집 ‘금아시문선’(60), 평론 ‘춘원선생’(61), 시집 ‘산호와 진주’(69), 수필집 ‘수필’, 셰익스피어 번역시집 ‘소네트시집’(76) ‘금아문선’ ‘금아시선’(80), 시집 ‘생명’ ‘삶의 노래-내가 사랑한 시, 내가 사랑한 시인’(93), 수필집 ‘인연’(96) ‘금아 피천득문학 전집’(97), 영문판 시 수필집 ‘A Skylark’(2001), 동화 ‘어린 벗에게’(2002) ‘인연’ 러시아어판(2006) 등.
△수상 경력
새싹문화상(79) 대한민국 문화예술상 은관문화훈장(91) 제9회 인촌상 문학부문(95) 제9회 자랑스러운 서울대인상(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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