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故) 정명조 주교의 삶과 사목 발자취
“그토록 건강하시고 활달하셨던 주교님께서 이렇게 돌아가신 것이 너무 안타깝고 가슴이 아픕니다.”
6월 1일 오후 늦은 시각, 정명조 주교의 시신이 안치된 남천 주교좌성당 소성전 입구에서 조문객들을 맞던 이규정 전 부산교구 평협 회장은 “개인적으로 저를 퍽 아껴주시고 사랑을 주셨던 주교님을 생각하면 더욱 허망하고 안타깝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소탈하면서도 호탕한 웃음이 매력적이던 고 정명조 주교. 때론 날카롭고 예리함 가운데서도 늘 타인에 대한 배려와 따스함을 잃지 않았던 정주교는 영정 모습 그대로 친근한 형님, 아버지로서의 추억을 남기고 우리 곁을 떠나갔다.
“무척이나 속정이 깊으신 분이시죠. 대하기 어려워 보여도 한번 사귀면 끝까지 정을 나누는 변함없는 분이시랍니다.”
군종신부 시절부터 30년간을 식복사로 봉사한 전명자(레지나)씨는 1998년 11월 군종교구장직을 떠나 부산교구 부교구장으로 부임하는 정명조 주교를 회고하며 당시 이같이 말했다. “전화 메모지도 이면지를 사용하시고 밤에 계단을 오를때도 불을 켜지 않을 정도로 알뜰함이 몸에 배었어요. 근검절약을 몸소 실천하는 분이시죠.”
정주교는 89년 10월 한국 천주교회 초대 군종교구장에 임명돼 만 9년1개월 동안 재임하며 군종교구 발전에 기초를 놓았다. 그때 붙여진 애칭이 ‘발의 목자’. 전국 각지의 군부대를 방문하기 위해 1년에 4만km를 넘게 다니는 정주교 모습은 마치 전도여행을 떠나는 바오로 사도를 무척이나 닮았다. 정주교의 승용차는 ‘움직이는 경당’이자 ‘이동 교구청’이라는 말이 붙은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수해 등 피해때 마다 군본당에 일일이 전화를 걸어 피해 상황을 점검하고, 성탄이나 영명축일때 매번 군종사제들에게 카드를 보내 격려하던 정주교의 꼼꼼하면서도 속깊은 정은 당시를 기억하는 많은 이들 가슴에 소중한 추억으로 남아 있다.
“기쁜데 왜 성당에 안갑니까. 기쁜데 왜 주일미사에 빠지고 냉담하겠습니까. 우리모두 ‘기쁨이 넘치는 교회’부터 만들어 가도록 노력합시다.”
‘기쁜 교회’ ‘활기찬 교회’에 대한 정주교의 소신은 부산교구장 재임시 ‘애향심’ ‘가난한 이 우선 선택’ ‘지역 복음화’라는 세 가지 사목적 지향으로 만개했다.
경남 거제군 거제면 명진리가 고향인 정주교는 99년 9월 부산교구장 착좌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부산은 산 바다 온천 모두를 지닌 천혜의 아름다운 땅입니다. 부산교구민들이 애향심을 가질때 뱃고동과 열차소리, 새소리를 한꺼번에 들을 수 있는 이 좋은 도시, 이 사회 발전에 기여할 수 있고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게 될 것입니다.”
8년9개월의 부산교구장 재임기간 동안 부산교구는 35만명이던 교세가 40만명으로 늘었다. 본당은 92개에서 107개로 늘었고, 사제수는 214명에서 309명으로 무려 45% 가까이 증가했다.
난산을 거듭하던 부산평화방송 개국을 성사시켰으며, 숙원사업이던 부산가톨릭대학교와 지산대학의 통합도 이뤄냈다. 건축분야에선 울산사회선교센터, 정하상 바오로 영성관, 맑은 하늘 피정의 집, 청소년 교육관 푸른나무, 하늘공원, 부산성모병원, 가톨릭센터 사제관 등을 완공했다.
정주교 재임 동안 이홍기 몬시뇰과 하안토니오 몬시뇰이 탄생하는 경사를 맞기도 했다. 살레시오수녀회(1999년 11월)를 시작으로 티없으신 마리아수녀회 재속회(2007년 5월)까지 10개의 수도회가 진출했다. 순교자 현양사업에도 각별한 관심을 기울여 순교자 김중권 단비 제막, 순교자 김범우 묘역 단장을 마무리하고 광안장대골 순교성지 개발후원회도 결성했다.
이밖에도 일본 히로시마교구?필리핀 인판타교구와 자매결연, 히로시마교구 선교 사제 파견, 대만 까오숭교구와 결연, 부산가톨릭의료원 출범, 사제 평생교육 실시, 시장사목 출범, 성가정 축복장 수여 등 교구 사목 전반에 괄목할만한 발전을 이루었다.
정주교는 생전에 일년에 꼭 한두번은 고향집에 들러 어머니(박금악.모니카.81년 선종)와 한방에서 자곤 했다. 아들 신부를 위해 ‘전용이불’을 손수 만들어놓고 1년에 단 한번 사용할 날을 기다리던 어머니께 못다한 효를 다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올 1월 1일, 남천성당에서 열린 부산교구 신년하례식. 정주교는 “하느님의 자녀답게 꿋꿋한 신앙으로 어려운 이웃들을 돌보는 삶을 살자”고 강조했다. 교구민들과의 공식적인 마지막 상견 자리가 되어버린 그날, 정주교는 깊숙이 머리를 숙이며 교구민과 인사를 나누었다. 몇 달 뒤 자신의 죽음을 마치 예견이나 한 것 처럼….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루카 1, 38)라는 사제·주교수품 사목표어 말씀처럼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평생을 봉헌한 정명조 주교. 이제 고단했던 이승의 삶을 마감하고 아버지의 집에서 천국의 보상을 누리시길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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