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명조 주교가 남긴 마지막 메시지
다음 글은 6월중 발간 예정인 정명조 주교의 유고 강론집 ‘서문’(序文)이다. 이 서문은 정주교가 지난 3월께 직접 썼다. 정주교가 이 세상에 남긴 마지막 메시지가 된 ‘서문’은 마치 그의 유언처럼 읽는 이의 가슴을 울린다.
신학교에 발 디디며 부르심의 길을 따라 걸어온 지 어느덧 50여년.
아득한 기억의 저편이지만, 주님께 부름받은 첫 걸음의 순간, 그것은 너무도 뚜렷한 삶의 나침반이었기에, 첫 마음 그대로 흩어짐 없는 삶을 살고자 노력해 왔습니다만 부족함이 너무나 많았습니다.
그런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이 길을 걸어올 수 있었던 것은 나 혼자만의 힘이 아니었습니다. 뜨거운 열정으로 가득찼던 신학교 시절, 의욕이 샘솟던 젊은 사제시절, 그리고 군종 교구장을 포함한 오랜 군 사목 시절은 물론, 부산 교구장으로 직무를 수행하는 동안 많은 사람들의 도움과 기도를 통해 주님께서 항상 함께 해 주신 길이었습니다.
몇 달 전, 병원의 주치의로부터 주변을 정리하는 것이 좋겠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의 삶을 다시 한번 되돌아보게 되었습니다. 믿는이들의 삶이 대체로 그러하듯이, 나 또한 하느님과의 만남을 위해 늘 준비하는 마음으로 살아왔지만, 만남의 시간이 가까이 다가온 시점에서 성직자로서의 내 삶이 하느님 앞에서 진정 부끄럼 없는 길이었는가를 성찰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그런 성찰의 과정에서, 내 삶에 도움을 준 사람들이 참 많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고, 그분들에 대한 감사의 정을 표하는 것이 정리의 마무리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나의 삶에 함께 하면서 여러 가지로 도움을 준 그분들에게 어떻게 감사하는 마음을 전할까 생각하다가, 사목자로서의 발자취가 내 삶의 전부이기에, 미력하나마 그 발자취 속에서 여기저기 흩어놓은 말씀의 이삭들을 모아 책으로 엮어, 감사의 정을 전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글을 정리하면서 제일 먼저 기억한 분은 김수환 추기경님입니다. 교회의 큰 어른으로서 평소에 늘 존경하는 마음을 지니고 그분의 글을 많이 읽었기 때문에 이 책 속에 그분의 흔적이 여기저기 많이 묻어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김추기경님 외에도 여러 사람들의 좋은 글에서 도움을 많이 받았지만 일일이 밝히지 못함을 송구스럽게 생각합니다.
그 다음으로 기억한 분들은 부산교구의 모든 신부님들과 수녀님들입니다.
당신들의 삶을 오롯이 주님께 바친 이 분들을 생각하면, 나와 더불어 이 길을 걸어가는 동행인으로서의 친애감이 느껴집니다. 아울러 나 혼자 감당할 수 없는 무거운 짐을 함께 들어준 이 분들에게 뜨겁게 솟구치는 형제애를 느낍니다. 그래서 나는 투병 중의 고통과 아픔을 우리 신부님들과 수녀님들을 위해서 봉헌하면서, 이분들이 모두 훌륭한 사제요 수도자로서의 삶을 사는 데 부족함이 없기를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
그 다음으로 기억한 분들은 부산교구의 신자들입니다. 언제나 나를 어른으로 대접해 주고 받들어 주고 기도해 주는 그분들에게 한없는 감사의 정을 느낍니다.
그 다음으로 기억한 분들은 물질적으로 정신적으로 도움을 준 은인들입니다. 이 분들의 도움이 있었기에 신학교와 본당 사제시절, 군 사목 생활 동안의 크고 작은 어려움들을 잘 견딜 수 있었고, 부산교구장으로서의 직무도 무사히 수행할 수 있었습니다.
여러 가지 방법으로 많은 도움을 준 이런 분들을 기억하면서, 삶의 길목길목마다 주님께서 수많은 사람들을 통해 넘치는 은총을 내게 주셨음을 깊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부족한 이 글이 남의 서가에 무게만 더해주는 것은 아닌지 염려스러우면서도, 주님께서 내게 주신 은총에 감사하는 마음을 전하고 싶어, 그리고 도움을 주신 분들에게도 감사하는 마음을 전하고 싶어 부족한 글을 책으로 엮었습니다.
만물이 새 생명의 환희로 가득차 초록의 아름다움을 한껏 드러내는 계절입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천상의 영원한 삶이 그와같이 아름다울 것을 생각합니다.
병고의 고통 속에서 삶과 죽음의 의미를 깊이 새기면서, 마지막 남은 날까지 주님의 뜻이 그대로 내게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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