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투 챔피언의 꿈 접다
신인왕전 앞두고 의식잃어
서울은 섬을 답답해 하며, 섬에서 탈출하길 원했던 ‘섬 소년’이 꿈꿔왔던 그런 서울이 아니었다. 종로와 을지로에는 높은 빌딩과 차로 가득했다.
하지만 정작 내 몸 하나 뉘울 집, 내가 탈 차는 없었다. 가난한 열아홉 시골 소년에게 서울은 또 하나의 삭막한 ‘섬’이었다.
섬 소년의 서울로의 탈출
주저 앉아 있을 수만은 없었다. 고향에서 가지고 온 돈도 거의 다 떨어져갔다. 당장 잠자리부터 해결해야 했다. 한 고향 선배를 어렵게 수소문해서 찾아갔다. 그 선배가 서대문에 위치한 권투 체육관을 소개해 주었다.
설레고 또 두려운 마음으로 체육관 문을 두드렸다.
다행히 관장님은 나를 쭉 훑어 보시더니 체육관에서 생활해도 좋다고 허락하셨다. 체육관은 어떤 대궐보다도 안락했다. 체육관 곳곳에 배인 땀 냄새가 향기롭게 느껴졌다. 세계 챔피언의 꿈을 키울 수 있는 장소였기 때문이다.
자신 있었다. 1~2년만 고생하면 세계 챔피언이 될 수 있다고 믿었다. 매일 밤 세계 챔피언이 되어서 고향 진도에서 카 퍼레이드를 하는 꿈을 꿨다. 체육관 청소, 선배 선수들을 뒷바라지 하는 일, 빨래와 식사 준비…. 힘들었지만 즐겁게 일했다.
하루, 이틀, 사흘…. 그러기를 얼마나 지났을까. 곁눈질로 운동을 배우던 어느 날이었다. 관장님이 나에게 권투에 소질이 보인다며 글러브를 끼어 보라고 했다. 본격적인 훈련이 시작된 것이다.
훈련에 훈련… 안구손상 입어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모든 것을 바쳐 운동했다. 내가 태어난 이후 그렇게 한 가지 일에 몰두한 것은 처음이었다. 남들이 쉴 때 한 번 더 줄넘기를 넘었고, 남들이 잘 때 혼자 새벽 2시를 넘겨가며 샌드백을 두들겼다. 원래 주먹질에는 소질이 있었던 데다가 연습까지 열심히 하자 효과는 금방 나타났다.
전라도 사투리가 서울 말과 대충 섞여 제법 촌티를 벗어날 무렵, 나는 어느새 어엿한 ‘선수’가 되어 있었다. 같은 체육관의 웬만한 동료 중에서는 상대가 없을 정도였다.
그러던 어느 날, 관장님은 나에게 신인왕전에 나가라고 했다. “너는 충분히 신인왕이 될 수 있어.” 하늘을 날 것만 같았다. 세계 챔피언을 향한 꿈의 첫발이 드디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더 열심히 연습했다. 잠자는 시간도 줄여가며 연습했다. 마음은 어느새 챔피언이었다. 하지만…. 하늘은 링 위의 삶을 허락하지 않았다. 평소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영양보충도 하지 않은 채, 심하게 운동한 것이 화근이었다.
신인왕전을 불과 며칠 남겨 놓지 않은 어느 날이었다. 그 날도 난 링 위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연습에 몰두하고 있었다. 순간 눈 앞이 캄캄해 왔다. 그리고 곧바로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눈을 다시 떴을 때는 병원이었다. “이렇게 누워 있을 시간 없어요. 다시 체육관으로 갈래요.” 일어서려는 나를 의사가 다시 주저 앉혔다. 그리고 나에게 “앞으로 운동을 할 수 없게 됐다. 운동을 하면 영원히 폐인이 된다”고 말했다. 심한 영양 실조와 과로, 격한 운동으로 인한 안구 손상이 그 이유였다.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챔피언의 꿈은 사라졌다. 더 이상 살아갈 의미가 없었다. “이제 난 어디로 가야 하나….” 병원에서 퇴원하는 날, 큰 비가 내렸다. 눈물이 쏟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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