벗이여, 하늘로의 여행
고이고이 편히 가게나
유의배 신부가 할머니를 와락 안았다.
“누구게요?” “심부님?”
할머니의 발음 탓인지 ‘신부’라는 말이 ‘심부’로 들린다. 원래는 신부(神父)라지만 그들에게는 심부(心父)일지도 모르는 일이다.
한센병 후유증으로 앞이 보이지 않고 손과 발마저 문드러졌지만 할머니는 유신부의 목소리 동선을 따라 어미를 따르는 새끼새 마냥 바쁘게 고개를 움직인다.
경상남도 산청군 산청읍 내리 100번지. 한센병환우들이 모여 사는 성심원의 하루다.
올해로 48돌을 맞은 성심원(원장 김기덕 수사). 그 가운데 유의배 신부(Uribe, Louis M., 작은 형제회)가 있다. 짧게 깎은 흰 머리에 덥수룩한 수염을 기른 벽안의 스페인 신부는 1976년 한국을 찾아 80년 이곳에 왔다.
“그 당시에는 시설이 아니고 마을이었어요. 한센병에 대한 인식이 좋지 않아 이곳으로 쫓겨와 살았던 거죠.”
뒤에는 지리산이 버티고 앞에는 경호강이 흐르는 성심원 위치는 당시 한센병환자들을 쫓아내기에 적합한 장소였다. 그는 처음 그들과 만났을 때를 아직도 생생히 기억한다.
“돼지, 소, 닭도 직접 키우고 아이들이 뛰어노는 ‘살아있는 마을’이었죠. 지금은 모두 나이가 드셔서 어르신들이 되고 아이들은 도시로 떠나 쓸쓸해요.”
열정과 사랑을 가지고 이곳에 왔지만 이미 직업이 있던 환우들에게 그가 해줄 수 있는 것은 미사봉헌과 병자성사뿐이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을까’하던 차에 마침 일이 생겼다.
해마다 세상을 떠나는 환우들의 ‘염’을 하는 일. 노령의 장의사 할아버지를 돕겠다고 시작한 일이 이제는 완전한 그의 일이 됐다.
“442명.” 자신이 이곳에 오면서 돌아가신 환우들의 숫자다. 살아있을 때 가족처럼 사랑을 나눴고 돌아가실 때는 베를 끊어다 옷을 해드렸으니 숫자를 기억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오래전 고인들을 뒷산에 매장할 때는 상여를 쫓아 배웅까지 했다. 현재는 화장식으로 바뀌어 염밖에 해드릴 수 없는 것이 안타깝지만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귀천길을 함께 했던 추억은 그에게 소중한 보물로 남아있다.
도대체 그는 어떤 힘으로 이역만리 먼 땅 환우들과 함께 했을까?
“병자 중 가장 대하기 어렵다는 환센병환우들에게서 저는 그리스도의 모습을 봅니다. 구약시대부터 편견에 치우쳐 갖은 수모를 당했을 이들을 동정이 아닌 신앙의 눈으로 바라봐야 합니다.”
봉사를 행하며 이들을 통해 그리스도와 구원의 순간을 만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는 가톨릭 신자가 이들에게 관심을 가져야하는 이유를 ‘그리스도를 통해’ 설명했다.
인터뷰를 마치고 언제나 그랬듯 성심원 요양소로 발길을 옮기는 유신부. 할머니의 모습이 보이자 “할머니!”하고 부르며 달려간다.
“오늘은 예쁜 옷 입으셨네.” 할머니의 분홍 환자복에 뺨을 비비며 연신 웃는 그의 모습은 흰머리와 흰 수염을 한 푸른 눈의 손자였다.
※문의 055-973-6966 성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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