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만의 늪에 빠져
밤 무대에서 출연 요청이 쇄도했다. 특유의 저음이 중년 여성들에게 어필을 한다는 이유에서였다. 실제로 많은 밤무대 사장님들이 “진도 때문에 매출이 두 배 이상 이상 뛰었다”며 두툼한 웃돈을 보너스로 주었다.
밤무대 생활은 화려했다. 불과 몇 개월 전만 해도 라면으로 끼니를 때워야 했던 것이 실감이 나지 않았다. 가는 곳 마다 사람들이 환영해 주었고, 내 노래를 들으며 즐거워했다.
그러면 그럴수록 나는 점점 교만의 늪에 빠지고 있었다. 돌이켜 보면 신인가요제 입상 후의 갑작스런 유명세는 나에게 독(毒)이었다.
겸손할 줄 몰랐고, 인기는 늘 옆에 있는 줄로만 착각하고 살았다. 악마는 그렇게 나의 영혼을 조금씩 파먹어 들어가고 있었다. 악마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악마는 교만한 나를 철저한 타락의 길로 이끌고 있었다.
1984년. 당시 일본 최대의 비쿠다 레코드사 사장이 한국 가수 섭외를 위해 한국을 찾았다. 당시 수많은 신인가수들을 심사한 사장은 뜻밖에도 나를 선택했다. 사장은 “진도씨만이 가지고 있는 특유의 저음에 끌렸다”고 했다. 일생에 한번 올까 말까한 행운을 잡게 된 것이다. ‘출세’에 눈이 멀었던 당시다.
생각하고 말 것이 없었다. 당장 보따리를 싸서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리고 곧바로 음반 제작에 들어갔다. 일본 최고의 시설에서 최고의 엔지니어, 최고의 뮤지션들과 함께하는 작업은 즐겁기만 했다. 음반 작업 이외에도 당시 일본에서 활동 중이던 김연자씨와 함께 일본 전역 순회 공연도 가졌다.
그러나 행복은 오래가지 않았다. 제작한 음반이 잘 팔리지 않았다. 게다가 회사 재정도 급속히 나빠지기 시작했다. 사장은 “조금만 참으면 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밤 무대에 나가서 노래를 부르고 음반을 팔아오라”고 했다.
나는 순진했다. 사장이 시키는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했다. 사장이 노래를 부르라면 불렀고, 음반을 팔라면 팔았다. 하지만 정작 나에게 돌아오는 것은 없었다. 그나마 조금씩 팔리는 음반의 판매 수익도 모두 레코드사에서 가져갔다. 월급도 받지 못했고, 근근히 밤 무대 팁으로 생활해야 했다.
그럼에도 사장을 믿고 열심히 노래를 불렀다. 1년, 2년…. 그렇게 3년이 흘렀다. 여건이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서서히 지치기 시작했다.
사장에게 이용당한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 것도 그 무렵이었다.
내가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자 사장은 나에게 일본 여성을 소개 시켜주겠다고 했다. 일본 여자와 결혼해 안정된 생활을 하다가 음반이 성공한 뒤에 한국으로 돌아갈 수 있게 해 주겠다는 것이었다. 일본 여자와 결혼한다는 것은 일본에 영원히 정착해 산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럴 수 없었다. 한국이 그리웠다.
“사장님 이제는 저를 풀어 주십시오.” 고민 끝에 내린 결단이었다. 사장은 “가지 말라”고 말렸지만, 내 고집을 꺽지 못했다.
북풍이 막 일기 시작할 무렵, 일본을 떠났다. 일본에서 보낸 3년은 잃어버린 세월이었다. 난 빈털터리였다. 일본으로 갈 때 그나마 가지고 있던 돈도 이제는 한푼도 없었다. 한국에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다.
“그래, 지난 세월은 잊고 이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자.”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두 주먹을 꼭 쥐었다.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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