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 애환 품으며 영적갈망 채워 주길"
아시아 첫 청각장애인 사제 탄생
미 유학 때 청각장애 사제들과 교류, 사목현장 경험
한국 넘어 아시아 청각장애 신자의 환경 개선 기대
■ 박민서 신부 탄생 의미와 전망
첫 청각장애인 사제 탄생은 한국교회 청각장애인 사목의 획을 긋는 뜻 깊은 경사로 여겨진다. 특히 전 세계적으로도 14명뿐이고 아시아에서는 단 한명도 없었던 청각장애인 사제가 한국에서 배출된 것은, 한국교회가 소외된 이웃을 위한 열린 교회 상을 세계교회 안에서 분명히 드러낸 것이며 앞으로 아시아교회 장애인 사목에 있어서도 한국교회가 앞장 서 나가겠다는 의지가 엿보인다고 볼 수 있다.
자신이 청각장애를 갖고 있기 때문에 청각장애인들이 신앙생활을 하며 겪는 어려움을 누구보다 잘 아는 박민서 신부가 사목 일선에 나선다는 점은 큰 의미를 갖는다.
박민서 신부를 사제의 길로 인도한 한국가톨릭농아선교협의회 지도 정순오 신부는 “아무리 수화를 잘 하더라도 신앙생활을 하는 그들의 영적인 갈망을 채워주고 인도하기에는 한계가 있다”며 “박민서 신부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깊은 사랑을 신자들에게 보다 잘 전해줄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고 말했다.
청각장애인인 미카엘 데프식 신부(미국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수도회)도 “청각장애인 신자들은 수화를 잘 하고 그들의 문화를 잘 이해하는 사제를 원한다”며 “한국 사람들에게 영어미사보다 한국어미사가 편한 것처럼 청각장애인들도 그들의 언어인 수화미사가 편하고 그들과 같은 청각장애인 신부의 영적인 도움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박민서 신부는 한국 뿐 아니라 미국에서 신학을 공부하며 현지 청각장애인 사제들과 교류하고 직접 현지 사목 현장을 경험한 바 있다. 따라서 역사가 깊고 비교적 활성화된 북미와 유럽의 청각장애인 사목 경험을 한국교회에 적용할 수 있는 길도 열릴 것으로 보인다. 또 앞서 언급한 대로 청각장애인 사제가 한 명도 없던 아시아교회에도 활기를 불어넣을 전망이다.
프란치스코 수도회 일본관구 소속으로 필리핀에서 청각장애인 사목을 담당하고 있는 사토 신부는 “박민서 신부는 한국 뿐 아니라 아시아 청각장애인들의 희망이나 다름없다”며 “홍콩과 일본, 필리핀, 대만 등 아시아 청각장애인들과 만남을 갖고 그들에게 용기를 줄 수 있는 목자가 됐으면 좋겠다”고 전했다.
개신교 등 타종교에 비해 선교활동이 미약한 청각장애인 사목도 한층 활성화될 전망이다. 현재 14개 교구 청각장애인선교 단체에 등록된 신자는 3000여 명선. 30만 명으로 추정되는 국내 청각장애인의 1%에 불과하다. 수화미사나 청각장애인들을 위한 배려가 부족해 쉬고 있는 신자도 상당수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청각장애인 목사만 100여 명에 달하고 각 교단별로 청각장애인 선교단체가 활발히 활동하는 개신교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한 형편이다.
정순오 신부는 “첫 청각장애인 신부 탄생은 사회전반에 걸친 편견을 깨고 소외된 이웃을 위해 앞서 나아가 포용하는 열린 교회의 모습을 보여준 뜻 깊은 일”이라며 “청각장애를 가진 신자들이 박민서 신부님을 통해 하느님께서 자신들을 장애인으로 버려두지 않고 몸소 거두시며 사랑하심을 느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 사제서품식 첫 미사 이모저모
7월 6일 서울 잠실실내체육관에서 38명의 부제들과 함께 사제품을 받은 박민서 신부는 주일인 7월 8일 서울 번동성당에서 첫 미사를 봉헌하고 사제로 첫 발을 내딛었다.
박신부는 7월 18일 서울가톨릭농아선교회를 시작으로 8월 말까지 서울 애화학교, 충주 성심학교, 서울 낙성대본당, 경기 평택 성 요셉 농아양로원 등을 잇달아 찾아 청각장애인들과 미사를 봉헌할 예정이다. 다음은 사제서품식 및 첫 미사 이모저모
○… 서품식 전 수화로 다짐 발표
사제서품식 전 대형화면을 통해 박민서 신부가 수화로 사제로서의 다짐을 전하자 체육관을 가득 메운 신자들은 박수로 환호. 이미 일간지와 방송을 통해 첫 청각장애인 사제 탄생 소식을 접한 신자들은 장애를 이겨내고 사제가 된 박신부가 장애인 뿐 아니라 모든 신자들에게 모범이 되는 사제가 되기를 한마음으로 기원.
○… 예 여기 있습니다. 예 순명하겠습니다.
서품 후보 선발에서 정순오 신부의 수화로 자신의 이름이 호명된 것을 안 박신부는 큰 소리로 “예”라고 대답하며 수품 후보자들 중 가장 먼저 제대 앞으로 걸어 나왔다. 청각을 잃어 언어 장애도 있는 박신부는 서품식 전 정순오 신부와 함께 예식서를 모두 외우고 서품 식 때 응답할 “예 여기 있습니다”와 “예 순명하겠습니다”를 미리 연습했다.
○… 번동본당 첫 미사
박신부는 서품 동기인 장원석 신부와 함께 7월 8일 오전 11시 서울 번동성당에서 첫 미사를 봉헌. 본당 역사상 처음으로 두 명의 사제가 한꺼번에 배출된 번동본당에는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많은 신자들이 찾아 새 신부들의 영육 간 건강을 기원했다.
본당은 미사 후 두 신부의 부모 형제를 초대해 조촐한 축하식과 축하연을 가졌다.
○… 둘도 없이 기쁜 날
서품식장에서 만난 한국가톨릭농아선교협의회 강명숙(데레사) 회장은 “오늘은 평생 둘도 없이 기쁜 날”이라며 “역경을 이겨내고 사제의 길에 들어선 신부님께 한국교회 청각장애인을 대표해서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 해외 청각장애인들도 대거 참석
해외 청각장애인들도 아시아 첫 청각장애인 사제 탄생을 축하하기 위해 사제서품식과 첫 미사에 대거 참석했다. 미국 최초 청각장애인 신부인 토마스 콜린 신부를 비롯해 카메룬의 그레고이레 수사, 프랑스의 필립 퍼타도 수사, 미국 패트릭 그레이빌 종신 부제 등 청각장애인 사제와 수도자들이 내한했으며, 일본과 필리핀, 캐나다의 청각장애인 신자 등 100여 명도 서품식에 참석했다.
■ 다음은 7월 8일 번동성당에서 첫 미사를 봉헌한 박민서 신부가 축하식 중 신자들에게 전한 인사말을 요약한 것이다.
사제가 되는 길은 뜨거운 햇살을 맞으며 사막을 걷는 것처럼 고달프고 힘들었습니다.
스스로의 힘으로 사제가 되는 것이 불가능한 것임도 깨달았습니다. 하느님의 은총과 제 주위에 계신 분들의 관심과 기도와 사랑은 저에게 매우 소중한 보물이었습니다. 이것이 저를 사제가 되게 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번동본당 모든 교우 분들과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교우 분들께 감사드리고 싶습니다. 또 사제서품식 참가를 위해 외국에서 온 분들에게도 감사드립니다.
제 이야기가 신문과 방송에 나가고 난 얼마 후였습니다. 한 수녀님께 편지를 받았습니다. 수녀님은 모두가 추켜세우더라도, 또 대단하다고 이야기할 때도 예수님이 타고 갔던 당나귀를 생각하라고 하셨습니다. 당나귀처럼 예수님의 사랑과 영원한 생명을 증거 하라고 말입니다. 수녀님께서는 기도하지 않으면 모든 것은 욕심대로 흐른다며 언제나 겸손하길 바란다고 당부하셨습니다.
저 박민서를 스타로 보지 말고 평범한 사제로 봐 주시기 바랍니다. 사제가 되기 전 마음처럼 언제나 예수그리스도의 마음에 드는 겸손한 사제가 되도록 여러분의 기도를 부탁드립니다. 여러분 모두 사랑합니다.
사진설명
▶서울 번동성당에서 열린 축하식에서 박민서 신부가 농아선교회 청소년들로부터 꽃다발을 받고 환하게 웃고 있다.
▶사제서품식 전 정진석 추기경과 기념촬영하는 박민서 신부와 가족. 왼쪽 첫번째가 박신부의 형 박외서(대건안드레아)씨, 오른쪽 한복 입은 이는 누나 박미자(카타리나)씨.
▶박민서 신부가 사제서품식 후 서울 대치2동본당 주임 김자문 신부에게 안수하고 있다. 1992년부터 14년간 교구 성소국장으로 재임한 김자문 신부는 박신부가 사제품을 받는데 큰 힘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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