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시골 본당은 뭐 할 만한 일들이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사목이라는 것은 무엇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사는 것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선배 신부님께 겨울에 영화상영이라도 하자고 액정을 하나 마련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할머니들은 노인정에 나가시고 조그마한 마당의 텃밭을 가꾸십니다. 가정방문을 가도 다들 일하시느라 바쁘시고 글은 안 보인다 하시고, 묵주기도 외에는 관심이 없으신 것 같습니다.
장기적으로 보면 시골에서 나도 같이 농사를 일구며 사는 것이 본당신부의 바람직한 모습이 아닐까하고 생각해보게 됩니다.
아무리 몸이 불편해도 생명을 기르는 일을 멈추는 할머니는 거의 없습니다. 요즘은 매일 아침 일어나면 문 앞에 호박 한 덩이, 가지, 고추 등이 늘 놓여 있습니다. 때론 상추도 있고, 깻잎도 있고, 열무김치도 놓여있습니다.
지난 겨울 어느 날 한 할머니가 메주 다섯 덩이를 선물로 갔다 놓으셨습니다. 저걸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다 인터넷에서 간장 담그기 등을 검색 해보고 제가 먹을 된장을 담그기로 결정했습니다. 예전에 어렸을 적 친정에서 보기만 했던 된장을 제가 직접 담그게 된 것입니다. 주변에 사시는 할머니들도 오시고, 손 없는 날을 잡아 양지 바른 곳에서 항아리도 잘 씻어놓고, 적당한 물에 소금은 세 되 정도….
집집마다 전승들이 달라서 한바탕 소란을 겪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많은 실랑이 끝에 장담그기를 마쳤습니다. 그런데 결론적으로 메주를 선물로 받다보니 소금물만 부으면 되지 뭡니까. 이렇게 쉽다니. 어떤 할머니께서 “담그기만 하면 뭐해 맛이 좋아야지”라고 하셨습니다. 맛은 바로 적당한 일조량과 통풍의 문제이겠지요.
하느님의 조리시간이 지나고, 메주를 건져내고 다른 항아리에 된장을 갈라놓았습니다. 간장도 맛있게 익어갑니다. 겨울에 담근 된장은 봄이 지나고, 여름이 지나고, 이제야 맛이 들어 너무 맛있게 먹고 있습니다.
참 긴 시간인 것 같습니다. 어머니들께서 당신들이 드실 된장을 마련하기위해 콩을 심고 콩이 자라 수확을 하고, 콩을 물에 불리고 삶고, 치대어 메주를 만들고 따뜻한 방에 두고 발효과정을 거치는 과정들. 자신의 입에 들어갈 먹을거리를 자신의 손으로 만들어내고, 이마에 땀을 흘린다는 것, 참으로 복음적이란 생각을 하게 됩니다.
패스트푸드(fast food)가 없었던 예전의 어머님들을 보면서 슬로우푸드(slow food)라고 굳이 말하지 않아도 생명을 기르고 오랜 기간을 기다려 음식을 얻고 그 오랜 기간을 통해 신앙이 성숙하고 완성되어 감을 마음으로 느끼게 됩니다.
언제 지나다 한 번 들르시게 되시면 제가 맛있는 된장국에 상추쌈 대접해 드리겠습니다.
이호 신부(광주대교구 사거리본당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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