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스럽고 당연한 조화
나는 가끔 아침에 걸어서 출근한다. 회사까지 도착하는데 약 1시간 가량 걸린다. 건강을 위한 운동에도 그만이지만, 넓게 펼쳐진 밭과 호남고속도로를 옆으로 보면서 걸으면 자연과 함께 기도 할 수 있어서 더욱 좋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묵주를 한 손에 들고 영광의 신비를 바치며 걷고 있을 때였다. 나뭇가지 하나가 내 눈길을 끌었다. 발걸음을 멈추고 그 나뭇가지를 유심히 쳐다봤다. 그것은 나뭇가지 모양을 한 벌레였다. 무심코 스쳐 지나갔으면 몰랐을 뻔 했다. 그 벌레는 새나 다른 동물로부터 그렇게 자신을 보호하고 있었다.
의문이 생겼다. 그 벌레가 의도적으로 그렇게 자신을 보호하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본능인가. 만약 학습을 통한 것이라면 과연 누구한테서 배웠나. 알에서 부화한 벌레는 어미와 만날 기회가 없었으니 배울 수도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벌레가 자신을 보호하는 방법은 과연 어떻게 알았을까.
도토리나 상수리는 그렇게 해서 자손을 좀 더 멀리 퍼뜨린다. TV의 한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에 나오는 심해 생물들의 삶을 보면 더욱 흥미롭다. 각기 먹이를 유도하기 위하여 각가지 모양을 하고 산다. 흑인, 백인, 몽골인, 한족 등 사람들의 모습도 각각 다르다. 우리 모두는 한국인이 되고 싶어서 된 것이 아니다.
자신들의 의도를 가지고 그런 골격과 모습으로 태어난 것은 아닌 것이다. 나뭇 가지를 붙잡고 있는 나뭇가지 모양의 벌레, 심해 물고기, 다람쥐, 에스키모인 그리고 지금 여기서 글을 쓰고 있는 나 스스로도 마찬가지다.
모두 부모의 염색체 결합과 자연의 조화로 그렇게 만들어졌고 주어진 환경에 맞게 살아간다. 그것이 자연스러운 태생이고 삶이다. 모습은 환경에 맞게 변하고 생존에 필요한 상태로 주위와 어울려 살아가게 되어있다.
뿌리혹박테리아나 새우와 말미잘과 같은 공생의 모습도 모두 삶과 환경의 조화이다. 그러나 이러한 조화가 본인들의 의도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모두 자연스럽고 당연한 조화다.
자연스럽고 당연한 조화!
그것이 무엇인가? 우리는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하게 진리와 법칙을 따를 때 “당연하다”고 말한다. 혹 한 가지라도 착오가 생기면 자연스럽지도 않고 당연하지도 않다. 자연스럽고 당연하다는 말은 정확하고 조화롭다는 뜻이다.
과학을 아는 인간은 통계 열역학으로 자연계와 물질의 결합 상태를 표현한다. 그리고 다윈의 진화론으로 종의 변화를 설명하기도 한다. 하지만 통계 열역학이나 다윈의 진화론 그리고 최근에 밝혀낸 게놈 지도로 벌레 모습, 심해 물고기 모습, 다람쥐, 인간의 모습을 설명하기에는 너무도 한심하다.
물론 ‘그렇게 될 수도 있다’고 설명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되어야 하는 상태는 설명하지 못한다. 그들은(벌레, 심해생물, 다람쥐, 인간) 그들의 모습으로 그렇게 살지 않았으면 서로 어울려 지금까지 생존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것은 가정이 아닌 현실이고 정확한 조화의 진실이다.
그들의 모습에는 의지가 담겨져 있고, 사랑이 담겨져 있다. 그 모든 것이 지금의 상태로 있는 것은 유일한 진실이지 가정이 아니다. 그것은 사랑의 의지이고 진리이고 현실이다. 자연계 모두가 정확하고 당연하게 배치된 상태를 알고 나면 감탄과 감사기도가 절로 나온다.
이 모든 것의 에너지가 우주에서 만들어진 핵융합 에너지로부터 시작되고 그렇게 만들어 졌다. 오늘도 그 에너지는 태양을 통해서 우리에게 오고 그 태양에너지는 광합성 과정을 거쳐 우리에게 먹을 거리를 제공한다.
물론 온 우주의 에너지 상태는 통계열역학 법칙과 일치하면서 조화를 이룬다. 그러나 그 조화는 단순한 물리적인 조화가 아니고 의지를 바탕으로 이룬 조화이다. 그 의지의 조화 때문에 오늘도 만물은 서로를 돕고 산다.
출근하는 길에 비가 촉촉이 내린다. 길옆에 백일홍이 피어있다. 그 속에서 하느님이 웃고 계신다. “그레고리오야. 볼 눈이 있는 자는 나를 본다.”
그렇게도 정겨운 주님은 찢어진 빵의 모습으로 내게 오신다. 그리고 끝도 없이 내어주시기만 한다.
국일현(그레고리오·원자력연구소 책임연구원·과학기술부 원자력안전전문위원)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