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사영 백서’ 원본보니 가슴 뭉클
순교자 황사영, 그리고 그가 하얀 명주에 가는 붓으로 조선 교회 신자들의 바람을 빼곡히 적은 백서(帛書)를 모르는 신자는 없을 것이다.
헌데 ‘황사영 백서’의 원본은 어디에 있을까. 고개를 갸웃하는 이가 대부분이다. 바티칸박물관 내 선교민속박물관(Ethnological Missionary Museum)을 9월초 찾았다. 그곳에서 황사영 백서를 만났다.
‘COREA’ 푯말 따라 들어가면
바티칸박물관 안에서도 비교적 널리 알려진 ‘피나코테카 박물관’이나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를 볼 수 있는 ‘시스틴 경당’에 비해 선교민속박물관은 비교적 한산하다. 중국 도교의 음과 양을 상징하는 사자상을 지나면 중국관과 일본관, 한국관이 눈에 들어온다. 바티칸박물관 대부분이 서구문화 일색인 것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
‘COREA’라는 푯말을 따라 들어서면 한국의 무속신앙이 소개된다. 환웅이 등장하는 단군신화를 상세히 설명하고 무당의 옷과 장구, 굿을 할 때 쓰는 원색 천도 전시돼 눈길을 끈다. 몸을 뒤로 돌리면 한국의 불교와 유교를 소개하는 전시실이다. ‘달마도’가 벽에 걸려 있고 금동미륵보살상도 한 자리를 차지한다.
갖가지 표정을 지닌 하회탈을 지나면 한국의 복음화를 소개하는 전시실이 눈에 들어온다. 전시실 한 가운데에는 ‘황사영 백서’ 원본이 놓여있고, 뒤쪽에는 순교당시 모습을 묘사한 그림이 병풍에 담겨있다. 백서의 깨알같은 글씨는 박물관을 찾은 순례자들의 눈을 사로잡는다. 한국 신자로서, 교회의 중심 바티칸에서 ‘황사영 백서’를 접하는 느낌은 남다르다.
선교민속박물관은 희년인 1925년 열린 세계선교박람회 물품들을 전시하고자 1926년 교황 비오 11세에 의해 라테란대성당 옆 사도궁 내에 설립됐다. 1963년 교황 요한 23세에 의해 현재의 바티칸으로 자리를 옮겼으며 2006년에는 7년간의 보수작업을 마치고 재개장했다. 새 단장한 선교민속박물관에는 현재 한국과 중국, 일본, 몽골, 티벳 등 아시아 각국의 민속자료와 선교사들이 수집한 교회 관련 자료들이 전시돼 있다.
한국관 전시물 중 가장 눈길을 끄는 ‘황사영 백서’는 조선 순교 복자 79위 시복식이 열렸던 1925년, 뮈텔 주교가 교황 비오 11세에게 전했고, 그 해 세계선교박람회에 전시된 이후로 박물관에서 계속 보관해오고 있다.
관광객으로 넘치는 ‘한국관’을
바티칸박물관은 바티칸을 방문하는 순례자나 관광객이라면 꼭 들르는 곳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선교민속박물관이나 한국관의 존재를 아는 한국인은 드물다. 바티칸박물관은 지난해 관람객들을 위한 라디오 가이드에 전 세계에서 일곱 번째로 한국어를 개통했다.
현재 일본과 중국관에 비해 규모가 협소한 한국관의 전시실도 계속 늘려나갈 계획이라고 한다. 한국교회와 한국 순례자들에 대한 박물관의 관심을 엿볼 수 있다. 한국 신자들이 꼭 한번 들러볼만한 의미 있는 장소임을 짐작케 한다.
■바티칸박물관 부라넬리 관장
한국문화 알리는‘선교의 장’ 기대
“한국관은 아시아에 대한 유럽인들의 문화적 지식을 키워주는 동시에 한국인들이 더 관심을 갖고 박물관을 방문할 수 있도록 하는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고고학자로 1996년부터 바티칸박물관 총 책임자로 일하고 있는 프란체스코 부라넬리(Francesco Buranelli) 관장은 선교민속박물관 내 한국관이 서양인들에게 아시아의 문화, 특별히 한국에 대한 지식의 모자이크를 완성해 갈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한다며 의미를 부여했다.
부라넬리 관장은 “한국관 개관 뿐 아니라 성염 전 교황청 대사님을 비롯한 한국 정부와 국민들의 도움으로 박물관 관람을 돕는 한국어 가이드를 개통했고 삼성전자는 박물관 입구 LCD TV 등 첨단기술을 제공했다”며 바티칸박물관과 한국의 인연을 강조했다.
“최근 일반에 공개된 황사영 백서를 한국의 그리스도교 전래와 박해와 관련된 여러 유물, 문헌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라 생각한다”는 부라넬리 박사는 “지금까지는 한국의 전통종교와 종교적인 실천행위를 보여주기 위해 노력했다면 이제는 한국을 알리는 전시물의 수준을 높이는 데 주안점을 두고 한국관을 꾸며나갈 계획”이라고 밝혔다.
부라넬리 관장은 박물관을 찾는 신자들에 대한 당부도 잊지 않았다.
“너무나 많은 관광객의 행렬 속에 파묻히고 무질서 속에 그냥 지나쳐버릴 수 있지만 바티칸박물관 방문은 교황님이 살고 계신 사도궁의 가장 심장부를 향해 가고 있는 뜻 깊은 일임을 생각해야 합니다. 박물관은 성지 중의 하나, 순례지 중의 하나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진설명
▶선교민속박물관 한국관을 찾은 한 관람객이 깨알같은 글씨로 쓰여진‘황
사영 백서’ 원본을 유심히 살펴보고 있다.
▶한국의 무속신앙을 소개한 무속신앙전시실.
▶각국 음성 가이드를 안내한 박물관 입구 안내판.
▶달마도와 불상으로 꾸며진 불교 유교 전시실.
▶지난해 7년만에 재개장한 선교민속박물관 내부.
기사입력일 : 2007-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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