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물인간 상태 환자의 급식은 의무”
교황청, 테리 쉬아보 급식장치 제거 부당함 지적
영양·물 공급은 일반적 치료수단으로 포기 불허
회복 불가능할 정도로 상태가 악화되어 소위 ‘식물인간’의 상태에 있는 환자에게도 영양 및 물을 공급하는 것은, 극히 드문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윤리적으로 의무에 해당한다고 교황청이 짤막한 문서를 통해 밝혔다.
교황청 신앙교리성은 9월 14일 미국 주교회의가 지난 2005년 불치병 환자에 대한 인위적인 영양과 물 공급 문제에 대해 교황청에 판단을 의뢰한데 대해 신앙교리성 장관 윌리암 레바다 추기경 명의의, 교황 베네딕토 16세의 승인을 받은 짧은 문건을 통해 공지했다.
이 공지는 지난 1990년 뇌 손상으로 인해 식물인간 상태가 된 뒤, 튜브를 통한 급식장치로 생명을 유지하다가, 2005년 미국 연방 대법원의 판결에 따라 급식장치가 제거돼 13일만인 3월 31일 숨을 거둔 테리 쉬아보 사건과 직접 관련된 것이다.
공지는 결론적으로 인위적이든 자연적이든 식물인간 상태의 인간일지라도 근본적인 인간의 존엄성을 상실한 것이 아니며, 급식장치는 그러한 인간 존엄성을 보호하기 위해 생명을 보존해주는 조치로서 특수한 의료적 치료가 아니라 환자를 돌보는 일반적인 조치라고 말했다.
따라서, 이 판단에 의하면 급식장치를 제거함으로써 테리 쉬아보가 생명을 유지할 수 없게 된 것은 윤리적으로 정당하지 않은 행위라고 할 수 있다.
이번 공지는 미국 주교회의측이 쉬아보가 세상을 떠난 뒤 윤리적 정당성에 대해 교황청의 명확한 입장을 밝혀줄 것을 요청한데 따른 것이다.
미국 주교회의의 문의는 두 가지였다.
첫째는, 소위 식물인간(vegetative state) 상태에 있는 환자에 대한 영양과 물의 공급-자연적인 수단에 의해서든지 인공적인 수단에 의해서든지-이 윤리적으로 의무인가 하는 것이다. 단 여기에서 환자의 신체가 이미 영양과 물을 섭취할 수 없는 상태이거나 이러한 물과 영양의 공급이 중대한 육체적 고통을 야기하는 경우는 제외한다.
이에 대해 교황청 신앙교리성 공지의 대답은 “예”(Yes)이다. 즉, 인위적인 수단에 의해서라도 영양과 물의 공급은 원칙적으로 생명의 보존을 위한 일반적인 수단이며, 따라서 의무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영양과 물을 공급하는 것은 환자가 굶주림과 탈수로 죽음과 고통을 겪지 않도록 해준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만약 자격이 있는 의사가 윤리적 확실성을 갖고 환자는 결코 의식을 회복할 수 없다고 판단했을 때, 이러한 영양과 물의 공급을 중단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이에 대한 신앙교리성의 대답은 “안된다”(No)이다. 다시 말해 ‘회복불가능한 식물인간상태’의 환자 역시 기본적인 인간 존엄성을 갖고 있으며 따라서 일반적이고 균형잡힌 돌봄을 받아야 하는데, 여기에는 원칙적으로 인위적인 수단일지라도 영양과 물의 공급이 포함된다는 것이다.
결국, 교황청, 즉 교회의 윤리적인 시각에서의 명백한 입장은 어떤 상태에 있는 환자라도 물과 영양의 공급은 반드시 계속돼야 하는 윤리적 의무이며, 그 의무에서 면제되는 것은 극히 일부의 상황에 그친다는 것이다.
미국 필라델피아에 본부를 둔 미국 가톨릭생명윤리센터의 에드워드 풀톤 교수는 교황청의 이번 공지가 “직접적으로 테리 쉬아보에 대한 언급”이라며 “쉬아보로부터 급식장치를 제거한 것은 올바른 일이 아니었다”고 말했다.
도미니코회 소속 교황청 신앙교리성의 차관인 어거스틴 디 노이아 신부는 바티칸 라디오와의 회견에서 이번 교황청 공지가 생명의 가치와 존엄성에 대해 명백한 선을 긋고 있다며 “삶의 질은 우리 어느 누구에 의해 판단될 수 없는 것이며 오직 하느님의 은총의 선물”이라고 말했다.
쉬아보의 부모와 형제들에 의해 설립된 테리 쉬아보 재단은 교황청의 공지가 나온 뒤 성명을 통해 공지의 내용에 대해 환영의 뜻을 표시하고 생명의 존엄성이라는 “타협할 수 없는 불변의 진리가 오늘 교황청에 의해 재확인됐다”고 말했다.
미국 주교회의 신앙교리위원회 위원장인 윌리암 로리 주교는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한 교회의 문헌들이 사목자와 윤리학자, 의사, 간호사와 환자의 가족들에게 커다란 도움과 지침이 될 것으로 믿는다”며 “쉬아보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교회의 가르침이 현실 세계에서 실현되도록 하는 것은 우리들의 큰 과제이고 도전”이라고 말했다.
◎테리 쉬아보 사건 개요
급식관 재연결 요구 대법원서 기각
테리 쉬아보(Terri Schiavo)라는 미국 여성은 섭식 장애로 인해 그녀가 27세이던 1990년 일시적으로 심장 발작을 일으켰는데, 이로 인해 심각한 두뇌 손상을 입었다. 그후 혼수상태에 빠졌고, 의식을 회복하지 못해 급식튜브(feeding and hydration tube)에 의해 24시간 간병을 받아야 하는 상태가 됐다.
그녀의 남편인 마이클(Michael Schiavo)는 1998년경 플로리다 주법원에 아내인 테리의 몸에 부착된 급식 튜브를 제거해달라는 취지로 소송을 제기했다. 그 이유는 “아내가 평소 자신에게 인공적 장치에 의해 연명하고 싶지 않았다는 의사표시를 했다”는 것이었다.
이와 관련해 법원이 공식적으로 지명한 의사들은 테리 쉬아보가 지속적인 식물인간 상태로서 의식을 회복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판단을 내린 상태였다. 남편은 결국 주 법원에서 급식 중단 허가를 받아 테리의 급식장치를 제거했다.
하지만 테리 쉬아보의 부모인 쉰들러 부부(Mary and Bob Schindler)는 테리가 자신들을 향해 미소를 짓거나 아주 단순하지만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소리를 내고 있을 뿐만 아니라 언제 깨어날지 모르는 상태이기 때문에 급식 장치의 재연결을 명하는 취지의 소송을 주 법원에 제기했다.
이들은 수일 동안 주지사와 의회에 탄원, 주 상원에서 23대 15, 주 하원에서 73대 24로 각각 법안을 통과시키는데 성공했는데, 그 내용은 식물인간의 급식관이 제거됐을 때 환자 가족이 반대하면 주지사가 재삽입을 명령할 수 있도록 한다는 것이었다.
당시 주지사는 이 법안에 즉각 서명했고, 이에 따라 테리에 대한 급식이 재개됐다. 결국 테리에 대한 급식을 가능하게 한 법안은 다시 주 대법원에 의해 삼권분립의 원칙에 위배된다는 이유로 그 법적 효력을 인정받지 못했다.
이와 관련해 부시 미 대통령은 휴가 일정까지 단축하고 백악관으로 돌아와 연방 상 하원이 통과시킨 특별법안에 서명, 남편과 부모의 소송은 주 차원을 떠나 연방 차원에서 해결돼야 한다는 근거를 마련함에 따라 연방법원으로 이송된다.
하지만 결국 2005년 3월 24일 미국 연방 대법원은 쉰들러 부부가 제기한 테리의 급식장치 재연결 청구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음으로써 사실상 소송이 마무리됐고, 테리는 급식장치 제거 후 13일이 지난 3월 31일 숨을 거뒀다.
사진설명
▶급식 튜브 제거로 생명을 잃은 테리 쉬아보는 플로리다주 클리어워터공원에 안장돼 있다.
▶성 베드로 광장에서 테리 쉬아보의 부모가 베네딕토 16세 교황에게 쉬아보의 사진과 사건 진상이 담긴 액자를 보이고 있다.
세계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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