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나의 첫 무대에서부터 좌우명이 만들어졌고, 첫 팬도 생겼다. 그분은 일개 앙상블 배우가 커튼콜 할 때 눈물을 흘리며 행복해하는 모습에 감동을 받았다면서, 주인공들을 제치고 나에게 사인을 해달라고 했다.
그리고 예상치못한 행운(?)이 다가왔다. 나는 두 번째 작품에서 주인공을 맡았다.
하지만 난 처음엔 그 작품에 참여할 수가 없었다. 나이도 어렸고, 너무 쟁쟁한 선배들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그때 나는 롯데 어드벤처에서 스페인 무용을 하면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매일 연습실에 내려와서 배워야할 것들을 필기하고, 선배님들 옷도 정리하고, 물도 떠다놓고…. 그러면서 혼자서 나름대로 역할을 정해 틈틈이 연습을 했었다. ‘조안’이라는 역할이었는데, 그 역을 맡은 선배가 너무나 멋있어 보여 “나도 언젠가 저 역할을 저 선배처럼 해야겠다” 싶은 마음에 그분의 습관과 행동, 걸음걸이까지 따라하곤 했었다. 그리고 내가 한 것은 오로지 연습이었다.
아무도 없는 연습실에서 새벽까지 연습했다. 상대방 대사까지 다 외워서 혼자 그야말로 원맨쇼를 했다. 정말 에너지가 넘치던 모습으로 기억한다.
그런데 그 언니에게 사고가 생겼다. 공연 9일 전인데 무대에 설 수 없게 됐다. 난 수많은 여자 역할 중에 딱 그 선배가 맡았던 역할만을 두 달 동안 연습했는데…. 세상에 그 역할을 갖고 오디션을 본다는 공고가 난 것이다. 당연히 나는 오디션에 참여했고, 합격의 기쁜 소식을 들었다.
난 노력하면 분명히 꿈이 이뤄진다고 믿는다. 또 설령 이뤄지지 않더라도 그 꿈을 위해 노력한 결과는 모두 내 안에 있는 것이니 큰 의미를 갖는다. 시험공부를 열심히 했는데 만약 그 내용이 시험에 안 나왔다고 해서, 내가 공부한 게 머릿속에서 사라지는 건 아니니까.
역할을 맡자마자 나는 머리모양을 일명 스포츠 형태의 짧은 머리모양으로 잘라냈다. 당시 내 머리칼은 엉덩이까지 내려오는 긴 형태였는데, 말괄량이 같은 그 역할을 소화하기 위해 눈물을 흘리며 잘라냈었다. 그리고 그 역할 이후로 내 위치는 앙상블이 아닌 조연의 자리로 바뀌었다.
그 이후로 몇 년 동안 나는 조연으로 활동했지만, 각각 주인공의 모든 대사와 행동들을 다 외웠었다. 내 노트에는 항상 두 명의 역할이 적혀있었고, 그건 누구도 아닌 바로 나자신과의 싸움이었어요.
뿐만 아니라 무대에 선다는 것은 많은 도전과 어려움을 함께 하는 것이다. 특히 나는 작품에 몰입되지 않을 때 가장 힘겨움을 느낀다. 모든 작품을 준비할 때마다 꼭 한 번씩 악몽을 꾸기도 한다. 내가 연구하고 생명을 불어넣은 인물들에 대해 관객들이 ‘저 정도는 나도 하겠다’라며 손가락질하는 꿈, 아니면 공연 나가려는 순간 의상이 하나도 없는 꿈 등이다. 어떤 때는 자다가 일어나 목소리가 나오는지 확인하고 다시 잠들곤 했었다. 혹시라도 내일 아침에 목소리가 안 나올까 걱정이 되어서였다.
물론 가끔은 ‘내가 왜 이렇게 자유롭지 못하게 살아야 하나’라는 생각도 한다. 하지만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에 행복하다는 걸 관객들의 박수를 받을 때 느낄 수 있다.
하나의 무대를 위한 연습 과정은 굉장히 힘이 든다. 누가 보지도 않는데 똑같은 노래와 춤을 몇 천 번씩 해야 하는 어려운 과정이다.
하지만 그걸 이겨내지 못하면 관객들의 박수를 기대할 수 없다.
기사입력일: 2007-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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